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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민수기 22장 : 발락(Balak) 의 파병 요청

by R.H. 2009. 12. 27.



히브리인들은 연승을 거두며 북진하고 있다. 아랏(Arad) 의 왕, 아모리의 왕 시혼(Sihon), 바산의 왕 오그(Og) 를 차례로 격파한 뒤 제리코 (Jericho, 여리고) 건너편 조던(Jordan, 요단) 지역에 진을 쳤다.

 

모압(Moab) 왕 발락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자신의 땅 바로 옆에 연정연승을 거두며 올라 온 이스라엘군이 진을 떡 하니 치고 있으니.. 당연히 다음 공격 대상은 모압이다. 이에 모압은 메소포타미아의 발람(Balaam) 이라는 인물에게 사신을 보낸다. 발람은 점쟁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어디 산 속에 움막 짓고 사는 xx도령 쯤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고대 점쟁이는 천문 관측을 하는 학자이자, 왕에게 조언하는 자리에 있는 정치인이다. 그러니까 평소에 모압의 왕이 발람을 통해 메소포타미아와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던 모양이다.

 

메소포타미아는 4대 문명지 가운데 하나로, 선진 제국 이집트와 비견되는 문명이 발달한 지역이다. 가나안 주변은 당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 비한다면, 오랑캐 국가 수준인 거고.. 즉, 모압 왕이 조공도 보내고, 때 되면 인사차 사신도 보내고 그랬던 듯. 해서 이스라엘군이 몰려 오니까, 사신을 급파한 거다.

 

사신을 맞이한 발람은 말한다. 내 주인(Lord) 에게서 답을 얻어 오겠으니 기다리라고... 한글 성경에는 여호와에게서 답을 얻어오겠다고 해놨는데, 이건 아닌 듯. 발람은 메소포타미아 사람이다. 이스라엘 신인 여호와를 믿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다. 그러니까, 발람의 Lord 는 여호와가 아니라, 자신의 주군이라고 봐야 한다.

 

여튼 발람의 주군은 파병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자 모압 왕 발락은 재차 사신을 보낸다. 충분히 보답을 하겠으며, 원하는 건 뭐든 하겠다(17절) 라는 말과 함께... 모압 왕이 진짜 똥줄 탔나 보다. 이에 발람의 주군(Lord) 은 발람에게 모압으로 가는 것을 허락한다. 대신 자신이 시킨 대로만 하라는 명을 내린다. 시킨 일이 뭔고 하니, 꾸물거리기다.

 

발람이 당나귀를 타고 모압으로 향하는데, 이 놈의 당나귀가 말을 안 듣는다. 도로에서 벗어나서 밭으로 들어가질 않나, 갑자기 벽에다 몸을 비비질 않나... 이것은 천사가 나타나서 발람의 길을 방해하고, 메세지를 전달했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여기서 환타지를 살짝 벗겨보면, 발람이 고의로 길을 지체하고 꾸물거린 거다.

 

예전 조일전쟁(임진왜란)때를 생각해 보자. 조선은 평소 명나라에 조공도 보내고 굽신굽신 외교를 잘 해놨다. 그래서 일본이 침략하자 명나라에 파병을 요청한다. 근데 파병을 곧장 보내줬나? 꾸물거리고, 지체하고... 그나마도 전선을 조선에서 마무리하겠다는 명나라의 의지가 없었다면 파병도 안 했을 거다.

 

메소포타이아와 모압은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와 비슷하다. 근데 불행히도 이스라엘인들은 메소포타미마에 쳐들어갈 마음은 없다는 것. 일본은 명을 치겠다고 공언했고... 즉, 메소포타미아에서 파병을 할 이유가 없다. 전선이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확대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괜히 전쟁에 끼어들기 싫은 거다. 근데 문제는 평소에 모압 왕 발락이 굽신굽신 잘 해왔다는 거다. 일언지하에 거절하기는 인간적으로 좀 민망한 것이다. 해서 발람이 모압으로 가는 길을 저리도 핑계대면서 꾸물거린다.

 

여하튼 발람이 모압에 도착하긴 했다. 얼마나 모압 왕 발락이 애가 탔는지 버선발로 성 밖으로 뛰쳐나와 발람을 영접한다. 그리고 말한다. "제가 급히 사신을 보냈지 않았습니까? 왜 이리 오지 않으셨던 겁니까? 제가 사례를 못 할까 그런 겁니까?" 발람은 답한다. "지금 왔지 않습니까? 하지만 내가 임의로 뭘 할 수는 없습니다. 내 주군의 명만을 전달해야 합니다."(36절~37절)

 

왜 늦었는지 발람은 설명도 안한다. 어쨌든 왔지 않느냐고, 거르름을 피우는 모양새다. 게다가 자기 주군의 말만 전할 것이라고 딱 잘라 말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메소포타미아(발람)는 모압(발락)을 도와주지 않는다.

 

모압 왕 발락은 평소 메소포타미아와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메소포타미아 왕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거물 인사 발람이라는 자에게 특히나 공을 들였던 듯 하다. 그러니 이스라엘군의 위협을 받자마자 사신을 급파한 거다. 발람은 모압의 믿는 구석이었다.

 

하지만 국제 정치에서 옛 정이라는 게 어디 먹혀 들어가나. 혈맹이니 우방이니 하는 말은 허울 좋은 말 뿐인 것을... 메소포타미아는 이스라엘과 그다지 이해관계가 없다. 이스라엘과 충돌할 것도 별로 없다. 괜히 이스라엘과 모압간의 전쟁에 끼어들고 싶지 않은 것이다. 병력을 파견해서 국고를 탕진하기도 싫고...

 

모압 왕 발락은 어리석은 군주였다. 평소에 대국 메소포타미아에 굽신굽신 했으니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자주 국방을 키우지 않는 나라의 꼴은 바로 이와 같다. 평소에는 굽신굽신, 그리고 급할 때는 팽 당하는 운명... 그리고 온갖 수모들.. 멀리 중동의 옛 이야기를 할 것도 없다. 조선의 선조가 그러했고, 지금도 반도에는 발락처럼 자주국방을 게을리하고 그저 대국에 굽신거리기만 하면 될 거라 생각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넘쳐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