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1

장미의 이름 (3) : 욕정과 금욕

R.H. 2009. 8. 17. 06:32

앗소 : 스승님도 사랑에 빠져본 적이 있으신가요?
윌리엄 : 사랑? 아주 많지.
앗소 : 정말요?
윌리엄 : 물론이지. 아리스토텔레스, 오비드, 버질...
앗소 : 아뇨. 제 말은...
윌리엄 : 사랑(love)과 욕정(lust)을 혼동하는 것 아니냐?
앗소 : 그런 걸까요? 그녀에게 뭔가를 주고 싶어요. 그녀가 행복하길 바라고요. 그녀를 가난에서 구하고 싶어요.
윌리엄  이런...
앗소 : "이런" 이라뇨?
윌리엄 : 사랑에 빠진 게로구나.
앗소 : 그게 나쁜 건가요?
윌리엄 : 수도사에게는 문제가 되기도 하지.
앗소 : 하지만 토마스 아퀴나스도 사랑의 미덕을 찬미하지 않았던가요?
윌리엄 : 맞다. 하지만 그건 신에 대한 사랑을 말하는 거다.
앗소 : 여자를 사랑하는 건요?
윌리엄 : 여자에 대해서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잘 몰랐지. 옛말에 여자는 남자의 고귀한 영혼은 빼앗는다고 했지. 
전도서에는 이런 말도 있다. " 죽음보다 더 고통인 것은 여자이다." 

앗소 : 하지만 스승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윌리엄 : 난 경험은 없지만, 신께서 아무 의미 없이 여자를 만들지는 않았을 게다. 하지만 금욕의 삶은 얼마나 평화로운가. 얼마나 안락하고, 잔잔한가.


이름 모를 소녀와 뜨거운 육체관계를 맺은 앗소는 사랑에 대해 스승에게 고민 상담을 한다. 중세시대 수도사에게 여자와의 관계는 죄악이다. 그런데 스승인 윌리엄은 앗소의 행위를 눈치채고도 모른 체 했으며, 앗소가 간접적으로 자신의 행위를 고백하는데도 꾸지람 한마디 없다. 다만 앗소가 사랑(love)과 욕정(lust)을 혼동하지나 않을까 하는 부분만 염려할 뿐이다.


윌리엄은 스스로 금욕하는 자다. 그러나 그가 금욕생활을 하는 것은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는 타인에게 금욕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지저분한 욕정에 빠지는 것을 경계할 뿐이다. 동시에 그는 자신에게도 금욕을 강요하는 게 아니다. 그는 금욕의 삶이 평화롭고 행복하기에 그런 삶을 사는 것 뿐이다. 행복은 사람마다 다른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반대로 뚱뚱한 도서관 부사서는 남색을 즐기는 자로, 금욕을 하지 못하는 수도자다. 그의 무절제한 살덩이들은 그가 욕정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자라는 것을 표현한다. 그리고 욕정을 멈추지 못하는 그는 자신의 몸을 채찍으로 괴롭힌다. 그는 자신의 육체를 극단적으로 혐오하고 내리치는 것은 그가 육체의 욕망을 극단적으로 갈구한다는 말과 같은 의미다.



주위를 유심히 살펴보라. 누군가가 아무 이유 없이 어떤 대상(그 무엇이 되었든 간에) 을 극단적으로 혐오한다면, 그는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 어떤 대상을 격렬하게 갈구한다는 것을. 자신의 육체를 격렬하게 혐오하고 있는 저 뚱뚱한 수도자가 사실은 육체의 쾌락을 격렬하게 갈구하는 것처럼 말이다.


진정으로 금욕의 삶을 실천하는 자는 윌리엄처럼 타인에게 그 당위성을 설파하지도 않고, 타인이 추구하는 다른 형태의 평화와 행복에 대해 비난도 꾸지람도 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욕정을 절제하지 못한 자들은 자신들의 욕정의 대상을 사악하다고 규정하면서 금욕을 흉내 내고  싶어한다. 사악한 것은 대상이 아니라 절제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욕정인데 말이다. 진정한 금욕주의자는 누구도 비난할 필요도 없기에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삶을 실천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