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시작된지 5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울컥한다. 딱봐도 재미있는 영화는 아니다. 연기파 배우들이 그려내는 감동 스토리도 아니다. 보나마나 지루한 다큐영화일 것이다. 그런데 감정이 크게 동한다. 영화를 본 것이 아니라 나를 보았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것은 나를 읽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 것은 나를 보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감정이 코너에 몰리고, 스트레스 수치가 감당 못할 수준이 될 때면, 갑자기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나곤 했다. 서로 용돈 주려하고, 서로 안 받으려하고, 몰래 가방에 숨겨 넣어주고.. 어릴적 잠든 내 손등을 쓰다듬던 까슬까슬한 할머니의 손. 자고 있지 않았으나, 그 느낌이 좋아 자는 척 했던 기억...
할머니와 손주 사이의 감정은 대체로 단순하다. 책임과 의무가 별로 얽혀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고 내 강아지, 할매 할매. 하는 단순한 감정이다. 단순한 보듬음과 단순한 위함만 있는 그 관계.. 따뜻하고 흐뭇하고 편안하다. 반면에 부모 자식 사이의 감정은 복잡하다. 책임과 의무로 얽혀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도 할머니와 엄마, 엄마와 딸 사이에는 날선 감정이 얼핏얼핏 보이곤 했다.
그래서 정신이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에 이르면, 뇌가 빠르게 전환되었나 보다. 급안정 모드인 할머니로 말이다. 할머니를 찾아서, 그 단순하고 따뜻한 감정 속으로, 그 품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우리들 머릿속에 지어놓은 정신의 도피처, 영원한 휴가지.. 바로 할머니의 먼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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