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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

이청준 단편 소설 <행복원의 예수, 1967>

by R.H. 2018. 9. 3.

 

 

 

‘행복원'이라는 고아원에서 나이가 제일 많은 ‘나'는 어느 날 밤 잠을 자다가 몹시 오줌이 마려워 뒷간을 가다가, 고아원의 ‘엄마'가 (’나'에게는 누나뻘인) 우물가에서 목욕하는 모습을 본다. 보려 해서 본 건 아니지만, 어영부영하다가, 오도 가도 못하고, 숨어서 지켜보게 된다. 하지만 누가 자신을 몰래 지켜보는 줄도 모른 채 목욕하고 있는 저 여자가  ‘나'는 안타깝다. 이건 또 무슨 도덕관념인지.. 그래서 인기척을 일부러 내버리게 되고, 그 순간 이후로 나는 엄마의 눈 밖에 난다. 

 

 

고아원의 엄마는 매주 일요일이면, 원생 아이 중에 하나를 말끔하게 차려 입혀 교회에 손잡고 가는데, 뭐. 원생 아이들은 딱히 따라가고 싶어하지 않는 일이다. 그래도 뭔가 돋보이는 일, 엄마의 특별한 관심을 받는 일인 건 확실하다. 그래서일까. 질투가 솟아난 나는 어느 날 엄마 손을 잡고 교회로 가는 그 아이의 뒤통수를 돌멩이로 찍어 누른다. 그날 이후, 나는 행복원에서 쫓겨난다.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이지 않은가?? 행복원...낙원...에덴 동산…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고, 성에 눈 뜬 아담과 이브, 그리고 추방. 큰 아들... 작은 아들... 질투... 돌멩이로 동생의 머리를 내리친 카인, 그리고 추방. 성경의 아담과 카인이 짬뽕되어 만들어진 인물이 바로 소설의 주인공 ‘나'다.

 

 

아담과 카인은 죄를 짓고, 신에게 용서 받지 못했다. 그들이 죄를 짓고, 자비로운 신이 용서를 베풀어 에덴동산에, 자기 고향에 그냥 살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들이 극형 처벌을 받은 것도 아니다. 그들은 어중간한 처벌인 추방 명령을 받았다. 이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아담과 카인 모두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려하지 않았다. 남 탓을 했다. 아담은 이브 이 요망한 년이 자기를 꼬득였다고 핑계를 댔고, 카인은 자기가 아벨을 지키는 사람이냐며 따져 물었다. 그래서 그들은 추방당했다. 삶을 지속하라고 명령받은 것이다. 자기 짐을 짊어지고 걸어갈 것을 명령받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책임이다. 신과 아담 사이에, 신과 카인 사이에 사명은 없다. 오직 책임만이 존재한다.

 

 

다시 소설로 돌아와서… 나는 행복원에서 추방 당한 뒤, 당장에 어려움에 직면한다. 행복원이 고아원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일용할 양식이 제공되는 보금자리는 맞으니까. 하지만 나는 자신이 가진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남을 속이는 일 말이다. 또, 사람들이 잘 속아 넘어가 주기까지 하니.. 군대에 가서 까지 사기 능력을 발휘해서 가짜 병으로 푹신한 침대 생활을 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사기질이 걸리지도 않고, 신앙 생활에서 배운, 셀프 사면으로 마음에 걸려할 것도 없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치 않다. 우리는 이것을 보통 양심이라고 부른다. 모양도, 소리도, 냄새도 없지만, 자기 안에서 아우성치는 이것.. 하여, 그는 자기도 모르게 다시 행복원으로 향한다. 

 

 

행복원에서 다시 만난 사람들은 나를 반갑게 맞이하며, 예전 일은 다 용서했노라는데.. 나는 이상하게도 오히려 두 다리의 힘이 빠지고, 허망하고, 마음속의 어느 한 부분이 주저앉는 느낌을 받는다. 특히나, 끝까지 자신을 용서하지 않았을 거라 굳게 믿었던 행복원의 관리인 최노인 마저 용서했다고 하니.. 더 맥이 풀리는 건 왜 일까. 최노인은 사실 고인이 되었다. 최노인의 지인들이 말하길 최노인이 그를 용서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은 그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렇게 했노라 스스로의 아량에 감격해” 한다는 것뿐... 신도 아담과 이브를, 카인을 용서치 않았건만, 어찌하여 인간들은 오만하게도 용서를 남발한단 말인가..

 

 

“예수의 손은 이미 비어버린 것이었다...(중략)...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사탕으로 믿고 싶어 했고, 예수로 하여금 그렇게 말하도록 강요했다. 그것은 인간 스스로의 기만이었고 가엾은 예수를 농락한 짓이었다”

 

 

소설에서 ‘나'는 예수의 손에는 사탕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의 손에 사탕이 있다고 굳게 믿고 싶어 한다. 하지만 사탕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인간들은 꿩 대신 닭이라고... 예수에게서 용서와 사면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오늘 당장 내가 백만장자가 되게 해주세요',라는 기도를 제 아무리 한다 해도 백만장자가 턱 하니 될 리가 없다. 그 달콤한 사탕이 저절로 내 손에 들어올 리 만무하다. 이걸 알아챈 인간들은 이제 자기가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 는 기도를 한다. 이건 손쉽게 얻어낼 수 있다. 자기가 용서받았다고 굳건히 믿으면 그만 이니까..

 

 

예수의 손에는 달콤한 사탕이 없다. 그리고 사탕을 줄 능력이 있다 해도 주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신에게 모든 것을 구한다. 부와 명예도 원하고, 재림 하셔서 나쁜 놈들을 단칼에 쳐 내버려 주시길 원한다. 하지만.. 이는 유아기적인 것이다. '그분이 다 해 주실 거야'라는 마음. 이것은 나는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 선택하고 행동하지 않으니, 당연히 책임질 일도 없지 않은가. 아담과 카인이 추방당한 이유는 책임 회피였다. 그런데 인간들은 끈질기게 사탕을 요구한다. 즉, 끈질기게 책임 회피를 요구하는 것이다. 예수 입장에서는 난감한 상황이다. 그리고 이걸 얻어낼 수 없다는 걸 눈치챈 인간들은 영악하게도 용서를 요구한다. 하여, ‘나'는 가엾은 예수라 하였다. 인간들에게 인질로 잡혀 있는 예수다.

 

 

그래서 ‘나'는 소설의 형식을 빌려 참회록을 쓰면서 예수 그림이 넣어진 액자를 벽에서 내려놓는다. 이는 더 이상 예수를 인질로 삼아, 못된 용서를 받아내는 짓을 하지 않겠다는 자기 선언적 행동이다. '나'는 자신의 짐을, 자기 책임을 등에 짊어지고 걸어가기로 결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