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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욥기 38장~41장 : 신의 대답, 사람 모르는 거다...

by R.H. 2018. 5. 21.



그 때에 주께서 욥에게,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서 대답하셨다.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 이제 허리를 동이고 대장부답게 일어서서, 묻는 말에 대답해 보아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 네가 그처럼 많이 알면, 내 물음에 대답해 보아라. 누가 이 땅을 설계하였는지, 너는 아느냐? 누가 그 위에 측량줄을 띄웠는지, 너는 아느냐? <새번역> 욥기 38장1절~5절



욥기 38장, 39장은 모두 아느냐? 아느냐? 아느냐?..,는 것이다. 땅이 어떻게 생겼는지, 중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바다가 왜 육지를 넘어오지 않는지, 죽음이 무엇인지, 사계절은 왜 생기며, 홍수는 왜 나고, 비는 왜 내리고, 풀은 어떻게 자라는지, 얼음이 어는 원리를 아는지, 별의 어떻게 운행하는지, 생명이 어떻게 태어나는지, 새는 왜 날개가 있으며, 말은 어찌 그리 힘차게 달리는지.. 인간인 니가 아냐는 것이다. 인간은 신의 섭리, 자연의 섭리, 우주의 섭리를 하나도 모른다는 것이다. 설령 설명해 준다 한들 알겠나.. 교과서에 나오는 중력의 법칙도, 상대성 이론도,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이해를 하냐고..그런 즉, 아무리 욥이 왜 억울하게 고통 받느냐고 묻지만, 그 이유를 설명해줘도 인간인 너는 모를 것이란 뜻이다. 



이렇게 38장과 39장에서 니가 아는 게 뭐냐며 인간의 무지를 지적하고는, 40장과 41장에서는 니가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 라며 인간의 무능을 지적한다. 이게 최종 결론이다. 우리는 아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허무주의나 패배주의라고는 볼 수 없다. 욥이 끊임없이 호소했던 무력감과 허무에 대한 답이 인간은 무지하고 무력하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보다는 우주의 이치를 알려줘도 인간은 알 수 없다는 의미다. 신의 계획, 신의 빅피쳐는 우리가 이해 못 할 사안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은 지나고 나서야, 우리가 죽고 나서 한참 뒤에야, 수 억 년 수 조 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명확해질 것이다. 우리는 그저 시간 속을 걸어갈 뿐. 묵묵히 걸어갈 뿐...이것은 허무주의와는 그 결이 전혀 다르다.



그런데 신은 욥이 왜 고통받는가에 대한 직접적인 답은 하지 않았다. 핵심 논제인 "고통"에 대한 답은 하지 않고, 대뜸 "지혜"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이는 논쟁 참가자들 모두가 ‘아무 죄 없는 사람이 왜 고통받는가' 라는  주제를 벗어나 자꾸만 지혜 타령을 해댔기 때문이다. 특히, 그 세 친구가 그랬다. 온갖 비유질 해대면서, 욥을 가르치고, 훈계질했다. 이에 욥도 세상에 지혜로운 사람은 니들 밖에 없나 보네.. 니들 죽으면 세상에 지혜도 사라지겠다??(12장), 라며 어이없어 할 정도였다. 청년 논객 엘리후는 욥에게 지혜를 가르쳐주겠다는 시건방까지 떨었고 말이다. 그러니 38장 이하 신의 응답은 욥에 대한 꾸짖음이라기보다는 토론 참가자 전부, 특히 욥의 반대편에서 논리를 폈던 자들에 대한 책망이다.



뭐, 핵심 논제는 제끼고 지혜 배틀이나 하던 토론 참여자들을 꾸짖었다치고.. 그 뒤에라도 욥이 왜 고통받는가에 대한 답을 간단하게라고 해 줄 법 한데, 한마디도 언급도 없이, 신의 응답이 끝난다. 이러면 욥기 1장과 엇박자가 난다. 1장에서는 분명 욥의 정의로움, 선함이 진짜인지 확인해 보기 위해 고통을 주었다고 했다. 처음부터 공개된 결론이었다. 그런데 38장 이하에서는 욥이 겪는 고통의 원인을 알려줘도 니들은 몰라, 라고 답한 꼴이 된다. 



신은 왜 ‘욥을 시험하기 위해서였다’는 이 간단한 답을 해주지 않는 걸까.. 그냥 1장에서 전제로 깔고 간 것이기에 굳이 다시 언급할 필요가 없어서일까.. 욥기를 읽는 사람은 그 답을 이미 1장에서 들었다 쳐도, 고통을 당하는 당사자와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답을 모르는데 말이다.. 



'인간은 무지하고 무능하다'는 신의 말에 이미 그 답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인간이 겪는 억울한 고통은 시험이다!!' 라고, 답해준다 해서 우리가 얻는 게 뭔가, 안다고 해서 뭘 어쩔 것인가, 할 수 있는 게 뭔가. 우리에게 고통이 닥치면, 아 이것은 나를 확인하는 시험이구나.. 하고 그 고통을 덤덤히 통과할 수 있는가. 욥처럼 허물 없는 자가 고통을 당하는 걸 보고, 그 사람을 위해 함께 투쟁할 것인가. 같이 그 고통을 느낄 것인가. 



모른다. 욥과 같이 절규할 수 도 있고, 선을 넘어 흑화될 수도 있다. 혹은 욥의 세 친구처럼 2차 가해자가 될지도 모른다... 모른다. 정말. 그 상황에 가 봐야 아는 것이다. 인간 대부분은 자기가 선의 편에 서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얼마나 오만한지…



영화 세븐이 생각난다. 



존 도 : 창문이 없는 방에 나와 단둘이 있고 싶을 테지. 나를 해치고도 처벌받지 않는다면 정말 행복하겠지?

밀즈 : 마음 아프구먼. 난 절대 그러지 않...

존 도 : 대가를 치러야 하니까 그러지 않는 것뿐이야.



존 도는 욥기의 사탄과 같은 자다. 밀즈는 범인을, 악인을 잡아 족치는 형사다. 그래서 확신한다. 자신은 선의 편에 서 있다고, 자신은 절대 살인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상황을 맞닥뜨리자, 살인자가 된다. 우리는 그 상황에 놓이지 않는 이상, 스스로를 확인할 수가 없다.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라는 확신? 평온한 상황에서 바라보는 나는 모두 허상이다. 신의 대답처럼, 우리는 모른다. 알 수가 없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하물며 우주의 원리랴...



그래서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왜 고통 받는가..’ 에 대한 답을 신은 욥 그리고, 욥기적 같은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는 해 주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스스로 얻어야 하는 답이다. 아니, 스스로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즉문즉설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자기계발서가 말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수학 공식 풀이처럼 해설을 들어서 아는 문제가 아니다. 앎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무서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