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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욥기 1장 ~3장 : 다 가진 자가 다 잃었을 때

by R.H. 2018. 5. 11.



욥기 1장 ~2장 : 다 가진 욥, 다 잃다



"그러자 사탄이 주께 아뢰었다. "욥이,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울타리로 감싸 주시고, 그가 하는 일이면 무엇에나 복을 주셔서, 그의 소유를 온 땅에 넘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제라도 주께서 손을 드셔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치시면, 그는 주님 앞에서 주님을 저주할 것입니다." -<새번역> 욥기 1장 9절~11절



정의롭고, 올바르고, 신실하고, 경건하고, 선한 사람. 그리고 화목한 가정과 부를 가진 사람...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삶. 다 가진 삶. 신이 이런 욥을 흡족해 하니, 사탄이 딴지를 건다. '욥이 바라는 것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복을 바라고 선하게 사는 것 아니겠는가.. 모든 것을 다 잃은 뒤에도 그가 온화한 인품, 선한 인품, 정의로운 인품을 유지할 수 있을까.. 욥은 그리고 우리는 가장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도 나 자신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여기서 사탄은 악이라기 보다는 삐딱한 현실주의자 관점이다.



잘 사는 사람들은 못 돼 쳐먹었고, 못 사는 사람들은 착할 거라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믿고 싶어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어느 유명 영화 감독이 부유층 자제들 모임에 나갔다가 받았다는 문화 충격 이야기를 오래전 읽은 적이 있다. 부잣집 자식들은 건방지고 교만하겠지..라는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그들은 여유롭고 자상하고 매너 있고, 겸손하고, 예의 바르더라는 것이다. 그렇다. 불공평하게도 물질적 풍요를 가진 사람이 마음의 풍요도 가지는 경우가 더 많다. 사람들의 소망과 달리 말이다... 



子曰: "貧而無怨難, 富而無驕易."<논어 14-10>

가난하면서 원망하지 않는 것은 어렵다. 부유하면서 교만하지 않는 것은 쉽다.



공자의 말처럼, 욥이 가난하게 된다면, 그 때에도 원망하지 않을 것인가. 그때에도 정직과 올바름을 유지할 수 있을까. 욥이 교만하지 않은 것, 올바른 것은 부유하고 행복하기 때문 아닐까. 사람은 삶이 가난하면, 마음도 가난해지기 쉽고, 삶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면, 그 마음 역시 일그러지기 쉽다. 그러니 욥도 삶이 고통으로 일그러진다면, 그의 마음 역시 그리 되지 않겠는가...



"모태에서 빈 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 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 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 이렇게 욥은, 이 모든 어려움을 당하고서도 죄를 짓지 않았으며,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새번역> 욥기 1장 21절~22절



그런데 욥은 흐트러지지 않는다. 그 마음이 일그러지지 않는다. 그러자 이제 사탄은 그의 뼈와 살을 치면 사람이 달라질 거라고 말한다. 돈은 잃기도 하고 얻기도 하지만, 육체는 하나 뿐이고, 생명도 하나 뿐이니까.. 자기 생명이 위협 받는 상황이라도 인간은 과연 올바름을 지켜낼 수 있을까.., 온화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런데 욥은 이런 지경에 이르러서도 말로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욥기 1장과 2장의 내용으로 보면, 욥은 고통을 견디고, 신을 원망하지 않은 사람이 맞다. 하지만, 욥을 위로하러 온 세 친구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3장부터는 욥의 태도가 돌변한다.



욥기 3장 : 욥이 자신의 태어남을 저주하다



마침내 욥이 먼저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며, 부르짖었다. 내가 태어난 날이여, 차라리 사라져버려라. 사내아이를 배었다고 하던 그 밤도 사라져버려라. 그 날이여, 어둠에 뒤덮여 위에서 하느님이 찾지도 않고 아예 동트지도 마라. 칠흑 같은 어둠이 그 날을 차지하여 구름으로 덮고 해는 그 빛을 잃게 하여 그 날을 공포 속에 몰아넣어라. 그 밤은 흑암에 빠져 한 해의 나날에 끼이지도 말고 다달의 계수에도 들지 마라.아, 아무도 잉태할 수 없어 환성을 잃은 밤이 되어라. 날을 저주하는 자들아, 레비아단을 깨울 수 있는 자들아, 그 밤을 저주하여라. 그 밤엔 새벽 별들도 빛을 잃고 기다리는 빛도 나타나지 말고 새벽 햇살도 아예 퍼지지 마라. 나의 모태가 그 문을 닫지 않아 내 눈이 마침내 고난을 보게 되었구나. 내가 어찌하여 모태에서 죽지 아니하였으며 나오면서 숨지지 아니하였는가? - <공동번역> 욥기 3장 1절~10절



욥은 자신의 태어남을 저주했다. 자신이 태어나던 그 날이 차라리 사라지기를.. 차라리 모태 속에서 죽어버렸기를면.. 그러면서 그 밤을, 그 탄생의 밤을 저주한다. 자신의 탄생을 저주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신성모독이다. 이 정도면 간접적으로 신을 저주한 거다. 신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라는 게 기독교의 기본 컨셉이니, 그 생명을 받은 날을 저주한다는 건, 신을 저주 한거나 다름없다. 막말로 나 살기 힘들다고 부모님 앞에 가서 왜 날 낳았냐고, 그 날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엄마 뱃속에서 죽어 버렸으면 좋았을 거라고, 그 밤을 저주한다고 한다면?? 이거 완전 패륜.. 욥기 3장 전체가 이런 내용이다. 



그렇다. 욥은 신을 향해 이런 소리를 끝도 없이 펼쳐 놓았다.그러니 욥이 고통을 감내하고 그 신실함을 보존하여 복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이제 내다 버리자. 공자 말이 맞다. 가난해지면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도 원망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다면, 사탄의 승리인가? 쿨병 걸린 현실주의자의 승리인가? 아니다. 욥은 분명 원망과 울분을 끝도 없이 토해내지만, 그가 선을 넘은 건 아니다. 그가 악인이 된 건 아니다. 될 대로 되란 식으로 파괴자가 된 건 아니다. 



우리는 본다. 내가 사는 게 힘드니 나보다 약한 사람을 찾아 짓누르며 분노를 해소하는 악인을... 내 삶이 망가졌으니, 너희 삶도 망가지라며, 도로 한복판에서 칼을 휘두르는 악인을.. 이른바 막가파라는 악인을.. 자리가 사람을 만들고, 상황이 인간을 만든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악인이 되는 건 아니다. 모두가 막가파가 되는 건 아니다. 우리는 고통과 고난의 상황에서 무언가를 확인한다. 나 자신을 확인한다. 나의 진짜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욥기를 계속해서 읽고 정리해나가면서, 더 하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