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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1

비밀은 없다(2016) - 21세기에 다시 쓰는 아가멤논

by R.H. 2016. 10. 29.





<결말 포함된 스포일러>



그리스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군대는 여신의 분노로 인해 바람이 불지 않아 트로이로의 출정을 못하고 있다. 여기에 전염병까지 번지면서 진영은 어수선해지고, 아가멤논의 리더쉽은 의심받는다. 하여 아가멤논은  딸과 아내를 속여 진영으로 데려와 딸을 희생 제물로 삼아, 여신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부하들의 신임을 얻어 출항한다. 이에 왕비인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치를 떨며 분노하고, 남편에 대한 복수심에 사로잡힌다.



근데 자기 딸을 희생삼아서까지 트로이로 전쟁을 하러가야만 하는 걸까? 그놈의 대의라는 건 얼마나 대단하단 말인가. 트로이와의 전쟁 명분은 트로이 왕자 파리스가 헬레나를 납치했다는 것이다. 이건 어거지다. 모두가 안다. 납치가 아니라, 헬레나와 파리스가 눈이 맞아 사랑의 도피를 했다는 걸 말이다. 그러니까 두 남녀의 불륜 때문에 수천수만의 군사들이 전쟁을 하러 간단다. 즉 죽으러 간다는 말이다. 이게 될 법한 소린가. 그래 백번 양보해서 헬레나가 납치되었다 치자. 한 사람을(헬레나) 구하기 위해 한 사람을(아가멤논의 딸) 산 채로 바다에 던져넣는 건 이치에 맞는단 말인가...



이런 끔찍한 일을 겪은 엄마의 분노, 증오, 슬픔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런데 수천 년동안, 이야기 속 그들도 이야기 밖의 우리도 그녀의 감정은 무시하고 지워버렸다. 아니 지우다 못해, 그녀를 나쁜 여자, 악처, 공적일 일을 우선시하지 않고 사적인 감정에만 매달리는 여자 취급 하며, 그녀를 외면했다. 그녀를 둘러싼 이야기 속의 사람들, 이야기 밖의 사람들 모두는 그녀를 이상한 여자 취급했다. 



이렇게 그녀의 감정은 배제당한 채, 그녀는 수천년간 이방인이었고, 영원한 외지인이었다. 그리하여 왕비 클리타임네스트라는 21세기 한국영화에서 연홍으로 되살아나 자신의 언어로 그들의 끔찍함에 대해 외친다.



"이 동네 사람들은 하나도 못 믿것다, 야"



트로이 전쟁의 명분을 아무리 그럴싸하게 갖다 붙여도 이건 말이 안 된다. 그냥 그들은 싸우고 때려 부수고 죽이고, 이기고 싶을 뿐이다. 이러한 과거의 살육 전쟁은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선 선거라는 모양으로 치러지고 있다. 김종찬은 아가멤논이다. 그는 선거라는 전쟁을 치르면서 아가멤논과 똑같이 딸과 아내를 속이고, 딸을 희생 제물로 삼았다.



"장티푸스로 자식이 죽어도 부모는 또 애를 만든다는 뜻이죠. 자식 죽는다고 부모 안 죽습니다. 한국당은 최대한 뽑아먹을 겁니다."



하지만 아가멤논처럼, 승리를 하자마자 그의 정치생명은 끝난다. 그런데 희한하다. 연홍에게 피 터지게 쳐맞고, 비닐봉지로 목 졸려 숨이 넘어가고, 죽음이 눈앞에 어른거리는데도 그는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다. 미안하다고 사과하지 않는다. 그 와중에도 그는 자신의 욕망만을 이야기한다. 아가멤논도 김종찬도.. 그리고 수많은 전래동화 속에서 자신의 딸을 팔아먹는 수많은 아버지들은 오로지 자신의 욕망에만 집중했던 것이다.



"여보, 나 오늘 노재순이 이겼다."



PS.

이 영화에 대한 평 중 이야기가 덜그럭거린다는 식의 말이 있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이 어쩌고저쩌고.. 뭐 대충 이런. 영화가 어색하다는 말인데.. 근데 이렇게 단순하고도 선명하게 주인공의 감정을 보여주는데 왜 어색해 하는 거지.. 싶었다. 근데 위에서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딸을 잃은 왕비의 정당한 분노는 지워버리고, 개선하고 돌아온 남편을 살해한 나쁜 년에만 시선을 고정해왔기 때문인 듯하다. 복수심에 미쳐날뛰는 여자는 그 복수심이 정당하건 아니건 언제나 항상 그냥 나쁜년이었으니까. 더구나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 자신의 딸마저 바다에 던져버리는 아가멤논의 잔혹함에 대해서는 누구도 말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아가멤논의 이야기는 그나마 양반이다. 우리에게는 심청전이라는 끔찍한 이야기가 있다. 자기 욕망에 눈먼 자가 딸을 뱃사람들, 그 거칠디거친 뱃사람들한테 팔아먹었는데도 사람들은 심봉사 불쌍하다 하니.. 도대체 그 배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상상도 하고 싶지 않으니, 사람들은 이 끔찍한 이야기를 아예 미담으로 바꿔버린걸까.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극악한 이야기다.


아가멤논은 왕비에 의해 살해라도 당했지.. 심봉사는 딸 팔아먹고는 노후에 호강임. 이럴수는 없는 거임. 그러니.. 이런 헤괴한 이야기들에 수천 년간 익숙해져버린 사람들에게 정당한 분노를 폭발하며 폭주하는 연홍이 너무도 낯설긴 했을 것이다. 너무 나쁜 것들에 파묻혀 살다 보니 정당한 게 이상하게 느껴지는 뭐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