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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고전

미노스와 스칼라 : 적을 사랑한 여자

by R.H. 2016. 7. 24.


스킬라에 대한 이야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384244&cid=40942&categoryId=31538


<적을 사랑한 여자>는 주인공 이름만 바뀌어, 나라별로 있는 흔해 빠진 이야기다. 한반도 버젼은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유대인 버젼은 다윗과 미갈, 그리스 신화 버젼으로는 미노스와 스칼라. 그리고 이런 류의 이야기에 대한 일반적인 평은 "사랑에 눈이 멀어 나라를 넘겨준 어리석은 여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면, 이런 평가가 얼마나 가혹하고 몰인정한것인지 알 수 있다. 낙랑공주와 미갈은 정략결혼의 희생자들이었다. 그들은 결혼 후 남편에게 충실했던 것 뿐이다. 이건 전통적으로 여성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아니었던가.. 남편과 아버지라는 두 권력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고뇌와 시련에 대한 이야기는 쏙 빼놓고, 그저 사랑밖에 모르는 단순하고 멍청한 여자들로 취급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부당하다.


스킬라의 이야기는 더 고약하다. 적장과 사랑에 빠진 스킬라 본인이 전쟁을 종식시키는 평화의 중재자 역할을 자처한다는 핑계로 나라를 넘겨줬다는 것이다. 근데 전쟁 중에 이게 과연 가당키나 한가. 시체 냄새, 피냄새, 비명과 울부짖음이 진동하는 상황에서 멀리서 적장 외모만 보고 뻑이 간다라.. 말이 안된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는 다른 버젼이 있는데, 스칼라의 아버지와 적장 미노스 사이에 정략결혼이 암묵적으로 있었고, 이를 배신한 것은 미노스라는 것이다. 사실 이게 더 타당해 보인다. 여튼.


이런 이야기 속 여자들에 평가는 부당할 뿐만 아니라, 그 결말 역시 혹독하다. 그녀들의 최후는 죽음 혹은 모욕과 경멸이었다. 낙랑공주와 스킬라는 죽고, 미갈은 모욕과 조롱 속에 유폐되었다. 두 권력의 충돌 사이에서 이용당하는 여자의 최후는 과연 비극일 수밖에 없는가.. 라는 씁쓸한 생각이 드는 때, 약간 다른 풍의 이야기가 생각 났으니.. 그것은 유비와 정략결혼한 손권의 누이동생 이야기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와 손씨 부인이 서로 잘 지낸 걸로 나온다. 어쩔 수 없이 손씨 부인이 오나라로 돌아간 뒤에는 유비가 죽었다는 잘못된 소문에 손씨 부인이 자살하는 걸로 이야기가 끝난다. 근데 이건 나관중이 두 사람의 스토리를 이런 류의 전통적인 이야기 틀에다가 구겨넣은 개뻥이다. 실제로는 이야기가 아주 많이 다르다.


손씨 부인은 어렸을 때부터 형제들과 어울리며 무예를 익혔고, 본인도 그걸 좋아했다고 한다. 유비한테 시집 올때도 자신의 시종 100여명을 항시 무장시켜 놓아서 유비가 처소에 들기도 꺼려했다고 하니.. 니들, 자긴 잔거니? 게다가 오나라에서 배 보내 돌아오라 하니, 손씨 부인은 뒤도 안 돌아보고 냉큼 돌아간다. 이런 여자가 유비 죽었다는 소문만 듣고, 자살한다고?? 그럴리가. 이후 손씨 부인의 행보는 정확히 안 나와있지만, 잘먹고 잘 살다 죽었을 거다.


손씨 부인이 다른 결말을 가질 수 있었던 건 비극의 여인들이 사랑이라는 감정에 휘둘려 행동한 것과 달리, 손씨 부인은 권력을 선택하고 그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이다. 결혼한 후에도 무장병력을 끼고 살았다는 건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권력이 뭔지 아는 여자고, 그 권력을 손아귀에서 결단코 내려놓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진 여자라는 말이다. 촉과 오 사이에서 그녀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나라로 떠난 것은 자신의 권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의 선택이자 행동인 것이다. 그래서 손씨 부인의 실제 결말은 비극이 아닌 것이다.(삼국지연의는 소설임. 믿지마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