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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리뷰/로스트

로스트 6-7 Dr. Linus : 절망과 유혹 사이

by R.H. 2010. 3. 14.


<주의! 스포일러>
 

무의미한 삶... 숨이 턱 막히고 맥이 탁 풀리는 말이다. 허탈함과, 우울함이 밀려오며, 우리를 한없이 무기력하게 만드는 말이다. 무의미한 사람 이라는 말은 더욱 끔찍하다. 이는 필요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에게, 혹은 어떤 단체에서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는 학벌을 만들고, 재산을 증식하고, 권력을 가지려 한다.

하지만 삶의 의미가 학벌, 재산, 권력은 아니다. 이것들이 삶에서 목적을 이루는 효과적인 수단이지만, 이것 자체가 삶의 목적(의미)은 아니다. 벤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는 알렉스였다. 소이어게 있어서는 줄리엣이고, 사이드에게는 나디아다. 인간에게 삶의 진짜 목적은 바로 인간이다.

절묘하다. 벤, 소이어, 사이드가 각자에게 소중한 사람을 상실하고, 깊은 절망에 빠진 순간 검은 연기가 유혹하는 것이.. 소이어에게는 "앎" 을, 사이드에게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소유"를,  벤에게는 "권력" 을 제안한다. 소이어 옆에 줄리엣이 있었다면.. 사이드 옆에 나디아가 있었다면.. 벤 옆에 알렉스가 있었다면.. 그들이 쉽게 검은 연기를 따라 나섰을까? 유혹은 우리가 가장 극한 절망에 휩싸여 있을 때 교활한 제안을 한다. 오싹하다. 견딜 수 없는 절망의 순간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전 에피들에서 소이어와 사이드는 검은 연기의 유혹에 말려들고 말았다. 이번 에피에서 벤 역시 검은 연기의 유혹에 말려드는 듯 하다. 그런데,

일라나를 향해 총부리를 겨눈 벤. 그는 총을 쏘지 않는다. 일라나를 죽이고, 검은 연기에게 가는 길을 선택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다른 길을 한번 시도해 본다.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 보이기로 한 것이다. 알렉스의 죽음이 자신의 잘못이고, 어리석음이었다고 인정한다. 그리고 말한다. 이제는 자신을 받아 줄 사람이 없다고..

세상에는 인간 관계 기술에 대한 수많은 조언서들이 널려 있다. 그런데 자신을 무장해제하고, 솔직하게 털어놓은 것보다 뛰어난 인간관계 기술은 없다. 놀랍게도 미움을 받았으면 받았지 동정심은 죽어도 받고 싶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이 꽤 된다. 특히나 벤처럼 리더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더더욱 그러하다. "날 받아줄 사람이 없다." 는 불쌍한 말을 하느니 차라리 검은 연기를 따라가고 말지 라고 하는 사람들이 꽤 된다는 것이다. 존심 상해서 죽어도 그런 말은 못하는 게 인간이기도 하다.

알렉스를 잃고, 사람들로부터 살인자라고 외면 받는 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절망스런 상황에 빠진 그의 손을 잡아 준 것은 일라나라는 한 명의 사람이었다. 그녀가 손 내밀지 않았다면, 벤 역시 검은 연기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과연 일라나와 같이 행동할 수 있을까? 자신의 아버지 같았던 사람을 죽인 자.. 비정하기 짝이 없고, 거짓말을 수시로 해대던 자.. 이 비열한 자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다. 이제야 이르러 그 자가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뉘우치고, 어리석음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이해를 구하고 있다. 그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지 한 사람의 이해다. 그녀는 벤을 이해해 준다.

우리가 절망에 빠진 사람을 이해하지 않으면, 궁지에 몰린 그는 위험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다. 벤이 검은 연기라는 위험한 선택을 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잘못과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자신의 나약함과 보잘 것 없음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뱀 같은 교활함을 가진 그가, 교묘하게 사람들을 이용하던 그가 지금 솔직하고 진솔한 자기고백을 했고 이런 그를 일라나는 이해해준다. 일라나의 이해를 구한 그는 이제 사람들 속으로 들어온다.


P.S. 소이어의 경우에는 스스로가 사람들 속에서 벗어나길 원했다. 사이드의 경우는 5시즌에서 아무 죄 없는 어린 벤을 죽인 사건이 내면의 선악 저울을 한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져 버리게 한 계기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