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붉은 꽃 이야기, 2003>
"옛날에, 중국의 한 스님이 멀리 있는 다른 스님을 찾아갔어.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날이 저물었지. '저쪽 방에 가서 주무시지요.' 객 스님이 인사를 하고 나갔다가, 도로 문을 열고 들어왔어. 이 객 스님 하는 말이, 밖이 어둡습니다, 스님. 한데 이 방에 있던 스님이 촛을을 건네주었다가, 객 스님이 받자마자 후욱, 불어 꺼버렸어. 바로 그때, 초를 들고 섰던 객스님의 눈에서, 깨달음의 눈물이 흘러내린 거라." 오빠에게 뺨맞고, 손에 짐승 같은 털이 더부룩한 수학 선생에게 뺨맞은 소녀. 부당한 폭력. 노려보는 눈, 저항의 눈. 더 강하게 조여오는 폭력. 코피가 터지고, 그날 첫 생리를 한다. 붉음.. 그것은 피의 색깔이고 폭력의 색깔이다. 동시에 아름다움과 욕망의 색깔이기도 하다. "짤막한 머리에 화..
2017. 2. 2.
이청준 단편 <숨은 손가락,1985 > <가해자의 얼굴, 1992>
"자신의 죽음을 고발로 모면"한 동준은 가해자이자, 피해자다. 이 더러운 세상이, 이 지옥같은 전쟁이, 끔찍한 이데올로기가 그를 이렇게 몰고 갔다, 악마같은 그들이 덫을 놓고, 그를 함정에 빠뜨렸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이해가는 말이지만, 옳은 말은 아니다. 이해받을 수 있다 하여, 무죄는 아닌 것이다. 내 목숨을 구걸하고자, 타인을 지목한 이 더러운 손가락이 내 몸에 붙어있는 한, 영원히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신 역시 가해자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고백하지 않는다면, 그 추악한 손가락을 잘라내지 않는다면.. 결국 그에게 남은 것은 죽음 뿐이다. 북쪽 사람에게도 남쪽 사람에게도 쫓기는 사람. 좌에서도 우에서도 죽이려드는 사람. 그 사람이 소년의 자형 소식을 알려준다면서, 소년의 ..
2016. 8. 30.
편혜영 <선의 법칙, 2015>
양복입는 일에 현혹되어 제3금융권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이수호...일확천금이라는 부풀려진 환상에 현혹되어 다단계에 빠진 윤세오, 신하정, 부이.. 수많은 사람들이 양복입고 하는 일에 환상을 갖지만, 그 일들은 사실 하찮고 지저분하며 모욕적인 일이다. 남보기 그럴싸해보이는 일, 다양한 종류의 그럴듯한 사업과 투자 따위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미끼를 던지고, 우리는 말려들어간다. 그 뿐인가. 해외로 이민가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냥, 가면 바로 선진국 중산층 시민으로 편입될 수 있는 냥, 선전하는 문구들. 환상들.. 우리 모두는 20대 언저리에서 어딘가로 빨려들어갔다. 그들은 우리를 유혹한다. 멋진 일, 멋진 곳이라고, 황금을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곳이라고.. 하지만 모두 함정이다. 그야말로 "시스템이 부풀려..
2016. 8.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