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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19

한강 <붉은 꽃 이야기, 2003> "옛날에, 중국의 한 스님이 멀리 있는 다른 스님을 찾아갔어.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날이 저물었지. '저쪽 방에 가서 주무시지요.' 객 스님이 인사를 하고 나갔다가, 도로 문을 열고 들어왔어. 이 객 스님 하는 말이, 밖이 어둡습니다, 스님. 한데 이 방에 있던 스님이 촛을을 건네주었다가, 객 스님이 받자마자 후욱, 불어 꺼버렸어. 바로 그때, 초를 들고 섰던 객스님의 눈에서, 깨달음의 눈물이 흘러내린 거라." 오빠에게 뺨맞고, 손에 짐승 같은 털이 더부룩한 수학 선생에게 뺨맞은 소녀. 부당한 폭력. 노려보는 눈, 저항의 눈. 더 강하게 조여오는 폭력. 코피가 터지고, 그날 첫 생리를 한다. 붉음.. 그것은 피의 색깔이고 폭력의 색깔이다. 동시에 아름다움과 욕망의 색깔이기도 하다. "짤막한 머리에 화.. 2017. 2. 2.
이청준 <흰옷, 1993> "이룬 것 없이 헛된 낭비만 일삼아 온 그의 삶이 견딜 수 없이 허망하고 아쉽게 느껴질수록 그 어릴 적 고향 학교 시절에 대한 추억과 집착은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과장스런 환영을 지어 부르곤 했다" 아버지 황종선 씨는 전란기 임시 소학교 시절을 소중한 기억으로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의 아들 동우는 전쟁통에 그런 학교는 없었다며 아버지를 추궁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과거를 의심하고 부정하려 든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비의 지난날과 세상살이를 우습게" 본다고 생각한다. 대학까지 나와 교사가 된 아들이 소학교 나온 아비의 과거를 결단 내려하고 있는 것이다. 팔씨름을 겨루는 듯한 기분이다. 아버지 종선 씨 입장에선 답답한 노릇이다. 객관적으로 증거할 자료가 없다 해서 그 과거가 없었던 건 아니건만, 아들의 추궁.. 2017. 1. 25.
박완서 단편 <환각의 나비> 어머니는 아들네 집에 가고 싶다. 옛날 사람에겐 아들만이 자식이다. 제아무리 딸과 사위가 정성을 들여도, 외손주들이 살갑게 대해도 그녀에게 딸네 집은 남의 집이다. 어머니에게 있어, 딸네 집에 산다는 건 남의 집에 얹혀사는 천덕꾸러기라는 의미다. 어머니는 하여 자기 집, 즉 아들네 집으로 가고 싶다. 그러나 치매 증상을 보이는 어머니를 며느리가 달가워할 리 없다. 치를 떠는 며느리와 귀찮아하는 아들.. 이들의 냉정한 태도에 맏딸은 어머니를 모셔오지만, 결국 어머니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쩌겠는가.. 옛날 어머니에겐 아들만이 자식인걸.. 교묘한 형태로 어머니는 자식에게 버림받았다. "그 집에는 느낌이 있었다." -본문 중- 위성 도시의 재개발 지역, 도시 속에 섬처럼 떠 있는 동네에 버려진 집이 하나 있다.. 2016. 10. 23.
박완서 단편 <꿈꾸는 인큐베이터, 1991> 주인공은 남 보기에 그럴듯한 삶을 산다. 중소건설업체 사장의 부인, 세 아이의 엄마, 별문제 없는 평온한 가정의 전업주부. 그야말로 바른 생활 교과서에 나올법한 전형적인 도시 중상층 가정이다. 그녀가 요즘 즐겨보는 영화는 이다. 아침 드라마같은 부부싸움이 주된 내용인 막장 드라마다. 딱, 과 같은 류의 이야기다. 증오로 얼룩진 부부 싸움. 그 싸움의 원인은 별 것도 아닌.. 이런 시시껄렁한 막장 드라마는 그녀에게 은밀한 즐거움과 카타르시를 주고 있다. 그런데 그녀는 왜 이런 증오의 이야기, 가정 파괴 이야기에 매료되었는가. 자신 안에 켜켜이 쌓인 증오 때문이다. "하늘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실패할 리 없는 방법이라는 게 여야 살해를 전제로 했으니까요. 치밀하고 계획적이고 과학적이고 감쪽같이 태아가 단지 .. 2016. 10. 13.
박완서 단편 <그 가을 사흘 동안> "사람을 질병에서 해방시키는 게 인술의 꿈이라면, 여자를 그런 질병 이상의 고독한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건 나의 꿈이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은 산부인과 의사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낙태만 하는 의사다. 그녀 자신이 강간 피해자였고, 원치 않는 아기를 낙태한 경험이 있다. 하여 그녀는 스스로를 다른 여성들을 고통에서 구원하는 해방자라 여기고 있다. 하지만 정작 해방되어야 할 사람은 그녀 자신이었다. 사흘 후면 그녀의 낙태 전문 병원은 문을 닫는다. 세월이 흐르고, 동네도 변하고, 그녀도 이젠 은퇴할 나이가 된 것이다. 그런데 뭔가가 자꾸 마음에 걸린다. 무언가 해야할 것만 같다. 낙태가 아니라, 살아있는 태아를 받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그녀에게 솟구쳐 오른 것이다. 그 가을 사흘 동안 그녀는 이 소망이 이.. 2016. 9. 15.
이청준 단편 <숨은 손가락,1985 > <가해자의 얼굴, 1992> "자신의 죽음을 고발로 모면"한 동준은 가해자이자, 피해자다. 이 더러운 세상이, 이 지옥같은 전쟁이, 끔찍한 이데올로기가 그를 이렇게 몰고 갔다, 악마같은 그들이 덫을 놓고, 그를 함정에 빠뜨렸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이해가는 말이지만, 옳은 말은 아니다. 이해받을 수 있다 하여, 무죄는 아닌 것이다. 내 목숨을 구걸하고자, 타인을 지목한 이 더러운 손가락이 내 몸에 붙어있는 한, 영원히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신 역시 가해자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고백하지 않는다면, 그 추악한 손가락을 잘라내지 않는다면.. 결국 그에게 남은 것은 죽음 뿐이다. 북쪽 사람에게도 남쪽 사람에게도 쫓기는 사람. 좌에서도 우에서도 죽이려드는 사람. 그 사람이 소년의 자형 소식을 알려준다면서, 소년의 .. 2016. 8. 30.
이청준 단편 <줄뺨, 1974> 집단을 가장 손쉽게 장악하는 방법은 체벌, 기합이다. 그리고 체벌에서 가장 초보적인 수준의 방법은 망신주기다. 망신 당하지 않기 위해 힘 가진 자의 명령에 복종해야함을 배우는 것이다. 망신 당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지켜보는 사람에게도 가르침을 준다. 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저기 저 망신 당하는 사람이 무고하고 억울하고 비합리적인 이유로 망신 당하고 있지만, 넌 이 상황을 바꿀 수 없다. 네가 할 수 있는 건 괴로워하고 굴욕감을 느끼는 것 뿐이다... 힘있는 자의 망신주기는 억압 당하는 자에게 무력함과 굴종을 가르치는 것이다. 망신주기 체벌이 먹혀들어가지 않을 경우엔, 좀 더 쎈 체벌이 있다. 낙오자, 패배자를 만들기다. 에선 연병장 돌기가 그 방법이다. 허약한 자들은 연병장을 돌다가 낙오한다. 트랙.. 2016. 8. 29.
이청준 단편 소설 <침몰선, 1968> "빌어먹을! 전쟁이라도 났으면!" 그들은 가끔 씨부려대었다... "그때는 오히려 좋았겠어요! 이건 뭡니까" 하긴 그럴 수밖에 없는 노릇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진짜 싸움 이야기는 알지 못했고, 게다가 그 우스운 군대 놀이의 이야기들에는 자신들도 입이 닳아 맥이 빠졌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에겐 정말로 신나는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본문 발췌) 진짜 전쟁이 뭔지 모르는 풋내기 군인들은 꼬맹이들을 모아놓고 가짜 전쟁 무용담을 신나게 지껄여댄다. 하지만 진짜 전쟁을 겪은 후, 그들은 더이상 전쟁을 말하지 않는다. 험상궂은 얼굴고 신경질내며 침묵할 뿐.... 진짜 전쟁의 참혹한 민낯을 알지 못하는 자는 전쟁을 숭배하고, 전쟁이라도 났으면 좋겠다는 끔찍한 말들을 씨부려대고, 진짜 삶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 자기.. 2016. 8. 25.
편혜영 <선의 법칙, 2015> 양복입는 일에 현혹되어 제3금융권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이수호...일확천금이라는 부풀려진 환상에 현혹되어 다단계에 빠진 윤세오, 신하정, 부이.. 수많은 사람들이 양복입고 하는 일에 환상을 갖지만, 그 일들은 사실 하찮고 지저분하며 모욕적인 일이다. 남보기 그럴싸해보이는 일, 다양한 종류의 그럴듯한 사업과 투자 따위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미끼를 던지고, 우리는 말려들어간다. 그 뿐인가. 해외로 이민가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냥, 가면 바로 선진국 중산층 시민으로 편입될 수 있는 냥, 선전하는 문구들. 환상들.. 우리 모두는 20대 언저리에서 어딘가로 빨려들어갔다. 그들은 우리를 유혹한다. 멋진 일, 멋진 곳이라고, 황금을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곳이라고.. 하지만 모두 함정이다. 그야말로 "시스템이 부풀려.. 2016. 8.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