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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소설

빅토르 위고 <레미제라블, 1862>

by R.H. 2019. 12. 26.

 

선택하는 인간은 흔들린다...

"그는 이제 막 자기 운명의 엄숙한 순간을 지나왔다는 것을, 이미 그에게는 중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앞으로 훌륭한 인간이 되지 않는다면 가장 악한 인간이 되고 말 거라는 것을, 이제 그는 주교보다 더 높이 오르거나 죄수보다 더 아래로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빵 한 조각을 훔친 죄, 탈옥을 한 죄에 대해 사회는 지독한 형벌을 장발장에게 내렸다. 형기를 마친 그에게는 이제 전과자라는 딱지가 붙어 있어, 세상은 그에게 하룻밤 묵는 것조차 허락치 않는다. 이에 장발장은 법과 질서, 사회와 인간을 증오한다. 거칠어지고 차가워진 그의 마음은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여 있다. 이런 그에게 편견 없이 묵을 곳을 허락한 주교.. 그런데 장발장은 이런 주교의 따뜻한 마음을 배신하고 은 촛대를 훔쳐 달아난다. 하지만 이런 몹쓸 인간을 다시 한번 감싸는 주교.. 장발장이 뼛속까지 악한이라면 주저 없이 흔들림 없이 주교의 호의를 비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어두운 마음 어딘가에는 양심이라는 것이 희미하게 있다. 하여 장발장은 흔들린다. 그는 더 나은 인간, 더 높은 인간이 되기로 선택한다. 이 순간이 장발장의 삶에서 첫번째 선택이었다. 이것은 벼락같은 선택의 순간이지만, 이후에 다가오는 수많은 선택들에 비하면 가장 단순하고도 쉬운 선택이었다. 이후의 선택들은 훨씬 더 복잡하다.

 

이후 마들렌느라는 새 이름으로 새로운 도시에 정착한 장발장은, 유리구슬 공장을 일으켜 세워 지역 경제를 떠받치는 사업가로 변신하고, 지역민들의 존경을 받아 시장에까지 오른다. 그리고 그는 두 번째 선택의 순간을 맞이한다. 포슐르방이라는 노인이 마차에 짓눌려 있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이다. 장발장을 추적하는 끈질긴 자베르의 눈에 포착된 장발장은 주저한다. 여기서 저 거대한 마차를 번쩍 들어 올린다면, 자베르는 장발장의 정체를 알게 될 것이다. 게다가 포슐르방은 평소에 마들렌느 시장(장발장)에게 악의를 품어온, 이른바 안티다. 장발장이 자신의 정체가 밝혀지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얄미운 저 노인을 도와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장발장은 마차를 들어 올린다. 그리고 자베르는 확신한다. 마들렌느가 흉악범 장발장이라는 것을.. 

하지만 하늘이 돕는 것인지.. 하늘이 그를 시험하는 것인지.. 이웃 도시에서 장발장이 좀 도둑질 하다가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마들렌느(장발장)는 이웃 도시 재판장에 들러 본다. 영락없이 장발장의 얼굴이다. 이대로 두면 저 좀도둑은 장발장이 되어 가중처벌을 받아 영원히 감옥에서 썩을 것이다. 반면에 자신은 자베르의 눈길에서 완전히 벗어나, 존경받는 사업가이자 시장으로 안락하게 살 수 있다. 세 번째 선택의 순간이다. 앞선 선택보다 더 어려운 순간이다. 단순히 자신의 정체를 밝히느냐 숨기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가 진짜 장발장이라고 신분을 밝히면,  유리 공장은 문을 닫을 것이다. 수 많은 실업자가 생기고, 그 가족들 역시 생계가 어려워질 것이다. 지역 경제 역시 몰락할 것이다. 그는 선택 앞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고뇌하고 흔들린다. 하지만 결심한다. 억울한 노인을 돕기로... 자신이 장발장임을 드러내기로... 그리하여 위조 신분으로 살던 장발장은 다시 감옥으로 들어간다. 

감옥 생활 노역 중의 어느 날. 장발장은 뱃머리에 걸린 한 남자를 죽음을 무릎 쓰고 살려내고, 정작 자신은 바닷 속으로 추락하고 만다. 이것을 계기로 공식적으로 장발장은 사망자 처리되고,  장발장은 다시 새 이름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시장 시절 알게된 불쌍한 여공 팡띤느가 여관집에 맡겨 놓은 어린 딸인 꼬제트를 되찾아온다. 여전히 그를 쫓는 자베르의 눈길을 피해 다니며 여러 번 신분을 바꾸지만 꼬제트와 함께 하는 삶은 이제까지의 그의 삶과는 다르다. 꼬제트는 어둡고 침울한 그의 삶에 작은 불빛과 같은 존재다. 하지만 어린 꼬제트도 이제 어엿한 숙녀가 되고, 사랑에 눈 뜨기 시작한다.

 

마리우스에게 꼬제트를 시집보낼 때, 그가 했던 고뇌는 앞선 선택의 순간에 했던 그 어떤 고뇌보다도 크고 아픈 것이었다. 바리케이드에 뛰어든 마리우스를 그냥 죽게 내버려 두어도 될 일이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꼬제트와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 터... 하지만 장발장은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며, 마리우스를 죽음 가운데서 건져내고, 그에게 꼬제트를 맡긴다. 게다가 마리우스에게 자신이 전과범이었다는 사실까지 고백한다. 굳이.. 그냥 아름다운 젊은 커플 곁에서 넉넉한 노후를 보내면 되는 것을.. 굳이 자신의 과거를 밝혀내어 자신을 그들로부터 떼어놓고, 고독 속에 자신을 두는 것. 이것의 그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완전한 양심의 인간.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 그는 그것을 해내고, 죽음을 맞는다.

선택할 수 없는 인간, 진보할 수 없는 인간에게 남은 것은 죽음 뿐...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혁명의 시대, 격변의 시대다. 그리고 소설의 주인공 장발장은 격변하는 인간이다. 시대에 휩쓸려 변하는 인간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의해 변하는 인간이다. 진보하는 세계, 진보하는 인간... 변화하는 인간이란 선택하는 인간이다. 그리고 선택하는 인간은 끊임없이 흔들린다. 끊임없이 고뇌하고 고통받는다. 이것이 장발장의 삶이다. 그리고 이것이 진보다.

 

이런 장발장과 대척점에 있는 인간이 자베르인데, 그는 법과 질서를 신앙으로 삼고 있는 경찰이다. 자베르는 도가 지나칠 정도로 가혹한 인간이지만, 비열한 인간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믿는 것을 완벽하게 실천할 뿐이다. 자베르는 선택하지 않는다. 그가 추종하는 법과 질서를 따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베르는 흔들리지도 고뇌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바리케이드에서 장발장이 자베르를 살려 주었을 때.. 자베르는 자신이 열렬히 믿는 세계 밖에 더 큰 세계가 있음을 깨닫는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는 확신 속에 살던 자베르를 뒤흔드는 순간이었다. 그의 세계 속에서 장발장은 영원한 범죄자이고, 흉악범이며, 처단되어야 하는 자다. 하지만 장발장은 다른 인간으로 진보 해있었다. 인간은 변하는 것이다...이젠 자베르가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다. 이전과는 다른 세계관을 인정한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과거, 삶, 질서를 통째로 헐어버려야 하는 것이다. 자베르는 흔들리고 고뇌한다. 한평생 이런 적은 없었다. 자베르가 자신을 세느 강에 던져버릴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진보를 향해 '아니'라는 말을 할 때 그들이 받는 벌은 미래가 아닐 그들 자신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어두운 병을 주는 것이다. 과거에 감염되는 것이다. '내일'을 거부하는 길은 오직 하나, 죽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그처럼 너희들은 애쓰지만 보답받는 자는 너희가 아니다'

사실 불만족스러운 결말이다. 그렇게 고통받고, 그렇게 노력하면 살던 장발장이 마지막에 얻은 것은 쓸쓸한 죽음이다. 모든 진실, 그러니까 장발장이 건네준 막대한 지참금이 아무 문제도 없고, 노력으로 번 깨끗한 돈이라는 것, 그리고 마리우스 자신을 초인적 힘으로 살려낸 것이 장발장이라는 것을 마리우스가 알게 되었으니.. 이제 꼬제트, 마리우스, 장발장 이 세 사람이 알콩달콩 재미나게 사는 결말이면 얼마나 좋냔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결말을 주지 않았다... 조금의 세속적 욕망도 허용치 않는 결말이다. 속인의 눈에는 너무도 슬픈 결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씁쓸한 결말일까.. 보답받지 못하는 애씀이 과연 속인이 아닌 대인에게 있어 헛된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근데 그런 시대가 오면 나는 없을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