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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

한강 <붉은 꽃 이야기, 2003>

by R.H. 2017. 2. 2.




"옛날에, 중국의 한 스님이 멀리 있는 다른 스님을 찾아갔어.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날이 저물었지. '저쪽 방에 가서 주무시지요.' 객 스님이 인사를 하고 나갔다가, 도로 문을 열고 들어왔어. 이 객 스님 하는 말이, 밖이 어둡습니다, 스님. 한데 이 방에 있던 스님이 촛을을 건네주었다가, 객 스님이 받자마자 후욱, 불어 꺼버렸어. 바로 그때, 초를 들고 섰던 객스님의 눈에서, 깨달음의 눈물이 흘러내린 거라."



오빠에게 뺨맞고, 손에 짐승 같은 털이 더부룩한 수학 선생에게 뺨맞은 소녀. 부당한 폭력. 노려보는 눈, 저항의 눈. 더 강하게 조여오는 폭력. 코피가 터지고, 그날 첫 생리를 한다. 



붉음.. 그것은 피의 색깔이고 폭력의 색깔이다. 동시에 아름다움과 욕망의 색깔이기도 하다.



"짤막한 머리에 화장기 없는 피부, 군더더기 없는 표정" 의 미대생 언니. 소녀를 쫓는 그녀의 시선. 그녀의 "쾌활하고 자유로워 보이는 걸음걸이" 를 흉내내어 보고, 허공에 붓질을 해보기도 하는 소녀.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일까, 선망일까.. 아니면 사랑일까. 그리고 소녀는 자신이 그려진 그림을 본다. 하지만 이 모든 욕망을 거부하리라.. 하여 그녀는 그 그림을 불태워 버린다. 



소녀는 놀랐을지도 모른다. 숨 막히는 듯한 느낌에 놀라고, 당황했을 것이다. 중요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 그림을, 그 그리움을, 그 사랑을, 그 아름다움을, 그 욕망을.. 태워버릴 것인가, 아니면 다락방에서 속세의 옷을 꺼내 입고 산을 내려갈 것인가... 촛불을 받아들고 돌아설 것인가, 촛불을 끄고 거기 그곳에서 그와 어둠을 함께할 것인가..



여기, 그림을 태우지도 산을 떠나지도 못한 채, 그림을 움켜쥐고 서성이는 사람. 촛불을 들고 나가지도 꺼버리지도 못한 채 여전히 주저하고 있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