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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소설

프랑수아즈 사강 <슬픔이여 안녕. 1954>

by R.H. 2017. 1. 30.






소설에는 세 유형의 성인 여성이 등장한다. 아버지의 애인인 엘자. 아버지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안느. 그리고 이웃 별장의 중산층 주부. 이 세 유형의 여인에 대한 10대의 마지막을 보내는 쎄실의 감정은 제각각이다.


"반은 상스럽고 반은 세속적인 쾌락을 즐기는 그런 여자... 상냥하고 너무 단순했으며 건방지지도 않았다."


먼저 아버지의 애인인 젊고 아름다운 엘자를 쎄실은 안쓰러워 한다. 엘자가 상스럽다고는 하지만 경멸하는 감정은 조금도 없다. 그렇다고 엘자와 쿵짝이 맞아서 친한 것도 아니다. 20대의 젊음을 가졌지만, 그것밖에는 없는 엘자를 안쓰러워하는 것이다. 그 젊음은 곧 종말을 맞이할 테니.. 


"그녀는 내 머리칼과 목덜미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이제 그만 져주고 싶은 욕망과 유순해지고 싶은 욕망이 나를 사로잡았다. 어떠한 감정이나 노여움이나 욕망도 이처럼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적은 없었다. 이 연극을 집어치우고, 내 인생을 의뢰하고, 죽을 때까지 안느의 손에 나를 맡기자. 나는 이처럼 마구 밀려오는, 이처럼 격렬한 나약함을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심장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두 번째로 안느에 대한 쎄실의 감정은 동경과 감탄을 넘어, 매혹당한 느낌이다. 이제 곧 성인이 되는 소녀가 사회적 성공을 거둔 40대의 세련되고 지적이고 품위 있고 우아한 멋진 여성을 볼 때의 감정이다. 자기관리를 할 줄 아는 여자. 침묵 속에 자기 주장을 할 줄 아는 여자. "움직이지 않고 똑바로 선 채 말할 수 있는 그런 여자"... 누군들 매혹당하지 않겠는가. 내가 저 여자를 사랑하는 건가, 홀린 건가.. 이상한 느낌이다.. 아, 나도 저렇게 멋있고 싶다. 저렇게 살고 싶다.. 저 여자의 질서 속에 편입되고 싶다..



그런데 어느새 새로운 느낌이 든다. 그 멋진 여성은 쉽게 나를 파악한다. 나를 압도하고 장악한다. 사회 경험이 풍부하고, 성공한 사람이 갖곤 하는 능력이다. 그런데 이러면 순간 불쾌해진다. 간파당하고 싶지 않다, 지고 싶지 않다는 묘한 저항심이 생기면서 사랑과 동경, 감탄은 갑자기 미움으로 돌변한다. 내 삶에서 밀쳐내고 싶고, 저렇게 되고 싶기도 하고.. 여튼 그런 복잡함이다. 



안느로 상징되는 질서가 주는 저 아름다움.. 질서가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다. 저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질서라는 안락함에 편안함에.. 하지만 이게 진짜 나인가. 내가 바라는 삶인가. 내가 목표하는 삶인가. 질서의 유혹을 뿌리쳐야 한다. 이것은 나, 쎄실이 아니다.


"그 부인이 자기 자신에 대해 만족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군요... 자기 의무를 다하고 있다는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에요...그분도 모든 사람들이 결혼하는 것처럼 결혼했겠죠. 욕망 때문에, 아니면 결혼이란 그저 하는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라도 말이에요. 그분은 어린애를 하나 가졌어요. 당신은 어떻게 해서 어린애가 생기는지 알겠죠? 그렇게 해서 그분은 그 어린애를 키웠던 거에요...그분은 수많은 여자들이 겪는 바로 그러한 삶을 누리고 있는 거에요. 그리고 그것이 자랑스러운 거예요. 알겠어요? 그분은 젊고 부르주아적인 아내와 어머니의 입장에 처해 있었고 또 거기서 벗어나려는 노력도 전혀 하지 않았어요. 그분은 이것도 저것도 하지 않은 것을 자만하고 있는 것이지, 어떤 것을 완수한 것을 자랑하는 게 아니예요...그건 속임수예요. 나중에는 이렇게 말하겠지요. '난 내 의무를 다했다.' 라고. 왜냐하면 아무것도 한 일이 없기 때문이에요. 만일 그분이 자기가 태어난 환경을 저버리고 매춘부라도 되었다면, 바로 그 점이 가치 있는 일이었을 거예요."



세 번째로 등장하는 여자는 부르주와적인 아내와 어머니 역할에 충실한, 우리식으로 말하면 현모양처 전업주부다. 그런데 쎄실은 사회가 이런 여자들에 표하는 존경심을 비웃는다. 자기 욕망이었든, 사회적 압박에 의해 떠밀려서였든 그녀들은 결혼하고 섹스하고, 애를 낳고 기른 것 뿐이라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삶, 모험하지 않은 삶, 안일한 삶을 살아놓고 사회적 대우를 받고 누리는 것은 어처구니가 없다고 맹렬히 독설을 퍼붓는다. 악담도 이런 악담이 없다. 이런 안일한 삶은 매춘부보다도 가치 없는 삶이란다.



이제 쎄실은 삶의 방향을 정했다. 당연히 짦은 젊음을 소비만 하는 엘자의 삶은 아니다. 매춘부보다도 못한 삶이라고 경멸하는 현모양처 중산층 주부는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고 자신을 매혹했던 안느로 대변되는 질서와 균형이 있는 삶도 아니다. 쎄실은 아버지처럼 살 것이다. 딸은, 소녀는 아버지처럼 살고 싶다. "생각하는 자유, 부당한 것을 생각하는 자유, 도를 지나쳐 생각하는 자유, 나 자신이 내 인생을 선택하는 자유, 그리고 나 자신을 스스로 선택하는 자유" 를 가진 삶을 말이다. 그리고 작가는 실제로 그렇게 살았다. 이 책은 작가의 자기 선언문이다.




P.S. 이 소설에 대해 엘렉트라 컴플렉스를 가끔 이야기하데, 동의하지 않는다. 아버지에 대한 딸의 감정은 동경이다. 아버지처럼 살고 싶다는 것이지, 아버지를 독차지하고 싶은 게 아니다. 아버지의 여자들에 대한 감정에 질투는 조금도 없다. 연민이나 감탄 그리고 저항이 있을 뿐.. 딸인 쎄실은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느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버지에 대한 딸의 감정이 너무 투명하다. "우왕! 우리 아빠, 짱짱짱!!!" 하는 어린이 같은 투명함이다. 차라리 안느에 대한 쎄실의 감정이 훨씬 묘하고, 은근하고, 끈적끈적하다. 안느를 미워한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유혹을 뿌리치는 느낌이다. 미워하는 여자가 자기 목덜미를 쓰다듬어주면 소름이 끼치는 게 당연한데, 쎄실은 심장이 멈춘 것만 같다고 한다. 이건 이건.. 사랑이잖아요.


혹은 안느를 계모로 치환된 엄마로 해석할 수도 있을 듯 하다. 신화에서 보여주는 부친살해처럼, 딸의 모친 살해, 간접 모친 살해로도 해석 가능.



한줄 요약 : '안느' 로 상징되는 질서, 구속, 규율, 그리고 그런 세계에 안주하고 싶은 유혹, 하지만 작가는 모든 선을 뛰어넘겠다는 의미의 표명으로서 안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신화적인 간접 모친살인. 정신의 탯줄을 끊겠다는 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