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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소설

프란츠 카프카 <소송, 1914>

by R.H. 2017. 1. 28.





"누군가 요제프 K를 중상모략한 게 분명했다. 아무런 나쁜 짓도 하지 않았는데 이날 아침 느닷없이 그가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요제프 K는 어느 날 느닷없이 날벼락 같은 기소를 당한다. 무엇 때문에 누구로부터 소송당했는지 알 수 없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소설이 끝나고 난 후에도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모든 것이 막연하고, 애매한 채, 그저 우리의 주인공은 소송을 당했다. 



소설 속에서 법원은 도시의 다락방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법과 소송은 그렇게 우리 삶 곳곳에 박혀서 우리를 괴롭히고 옥죄고 있다는 의미다. 



K는 이 소송을 해결하기 위해 숙부가 소개한 변호사를 만나고, 브로커를 만나고, 법원 공무원을 만나고 다닌다. 법과 소송을 이야기하는데, 여기에 법이 마땅히 지녀야 할 기본 가치, 정의, 윤리 따윈 거론되지 않는다. 지리멸렬하게 진행되는 소송, 사람을 숨 막히게 하는 법원 사무처, 일은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변호사, 기나긴 소송에 삶과 재산을 날려버린 상인, 브로커 따위만이 "소송" 이라는 소설에 등장할 뿐이다. (이 브로커는 재판관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도 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일로, 그는 판사들이 원하는 게 뭔지 잘 알고 사법기관의 속성을 캐치하는 능력이 있다는 의미다.)



소설은 소송에 대한 것인데 소송의 실질적인 내용은 없다. 쉽게 매수되는 법원의 말단 직원들, 고위 관리와의 연줄에 좌지우지되는 소송 결과, 이상하고 지리한 법원 시스템 그 앞에서 쪼그라드는 인간 심리, 엉망진창인 사법 시스템.. 법원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복잡다단하고 지리멸렬한 일들, 사람을 닳아 지치게 만드는 소송, 사람을 진 빠지게 하는 소송 소송 소송...

 


돈쓰고 시간 쓰고 마음 쓰고 생활은 엉망이 되고 사람 말려 죽이는 과정만을 리얼하게가 아니라...기괴하고 그로테스크하게 보여준다.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영화를 글자로 읽는 느낌이다.



"막연한 희망으로 기만하고 막연한 두려움으로 괴롭힐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막연한 희망으로 기만당하고, 막연한 두려움으로 괴롭힘당하며 1년을 지내다 우리의 주인공은 개죽음 당한다. 그렇다. 우리 인생이 이렇다. 언제 어디서 누구로부터 느닷없이 고발당하고 기소당하고 소송에 휘말릴지 모르는 삶이다. 가벼운 접촉사고가, 이웃 간의 층간 소음이, 사소한 말다툼이, 인터넷 댓글이, 갑자기 고발과 기소로 확장되는 것을 끊임없이 본다. 우리도, 나도 언젠간 이런 상황에 놓이지 말란 법 없다. 삶은 불안하다. 막연하게 불안하다. 



언제나 타인에게 심판받고, 비판받고, 지적질 당하는 우리의 삶. 우리는 항상 기소당한 채 살고 있다. 누가 기소했는가? 무엇 때문에 기소당했는가? 모든 것이 막연한 가운데, 그렇게 막연한 희망이라는 함정에 빠지고, 막연한 두려움의 덫에 걸린 채, 도대체 뭐가 뭔지도 모른 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인생을 살다가, 느닷없이 죽음이라는 최종판결을 받고 마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스무 개의 손을 가지고 세상에 뛰어들려고 했고, 게다가 동의를 받을 수 없는 목적을 이루려고 했다. 그건 옳지 않은 일이었다."



추가 - 9장에서 법의 문 앞에서 벌어지는 문지기와 시골 남자의 우화.


법이 존재하는 목적은 우리를 보호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법안에 들어가질 못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상인처럼 그들의 전문적인 용어를 제대로 이해도 못해서 자기 돈 주고 고용한 변호사가 되려 갑질을 한다. 그리고 우리를 보호한다는 그들이 우리를 기소했을 때 우리는 스스로를 방어할 힘도 없다. 우리는 치외법권 지역에서 살고 싶지 않다. 법안으로 들어가고 싶다. 저 안에는 법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그런데 문 앞에 떡 하니 버티고 있는 문지기. 그는 '그러나 지금은 안되오' 고 말한다. 시골 남자는 그 문 옆에 앉아 하염없이 기다린다. 문지기를 설득도 해보고, 뇌물도 줘 보고.. 그러다가 늙어버린다. 그러자 문지기는 이제 문을 닫는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은 누구도 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소. 당신만이 이 입구로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 난 이제 가서 입구를 걸어 잠그겠소" 


문지기는 시골남자를 기만한 것일까. 아니면 시골 남자가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일까. 법을 지키는 자들은 우리를 기만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