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1

장미의 이름 (4) : 민중과 지식인

R.H. 2009. 8. 17. 06:46

 






수도원에서 빈민들에게 던져주는 음식 찌꺼기들을 줍는 한 소녀. 이런 그녀를 본 앗소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음식 쓰레기를 줍는 그녀의 모습은 결코 매력적이지 않다. 지저분한 외모와 음식을 줍기 위해 다른 빈민들과 아귀다툼하는 그녀는 괴성을 지르고 있다. 그녀의 어떤 모습에 앗소는 눈길을 주는 것인가? 또한 영화에서 그녀는 단 한번도 사람과 같은 말을 하지 않는다. 마치 야생 짐승과도 같다.


그리고 우연히 들어간 창고에서 그녀와 앗소는 육체 관계를 맺는다. 그녀가 수도원에 몰래 들어온 이유는 자신의 몸을 팔아 음식을 얻어가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날 밤 앗소는 스승에게 간접적으로 그녀와  관계했음을 드러내고 고민 상담을 한다. 몸을 파는 천박한 행위를 하는 그녀에게서 앗소는 사랑을 느끼는 걸까? 그것은 단순히 육체적 느낌만은 아니었다. 앗소는 분명히 그녀를 사랑했고, 평생 그녀의 얼굴을 또렷이 기억했다고 한다.


그녀는 하나의 상징 아닐까? 다시 말해 "민중" 의 모습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헐벗고 굶주리고, 유식한 언어를 사용할 줄 모르는 민중. 그녀를 "민중" 이라는 단어로 변환시켜 놓으면, 앗소가 사랑한 것은 바로 한 여자가 아니라 민중이다. 


이 안타까운 민중은 음식을 구한다는 절박한 이유로 몸을 판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도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한 채 괴성과 슬픈 눈빛만을 지으며 착취계급에게 끌려간다. 이렇게 억울한 그녀를 안타까워하는 앗소는 아무런 힘이 없다. 그나마 그녀를 위해 말 한마디 해줄 사람은 그의 스승인 윌리엄이다.


그런데 윌리엄은 방관한다. 이것은 이전 경험 때문이다. 윌리엄은 한때 이단 심판관이었는데, 어느 억울한 피고인을 변호하다가 되려 자신이 이단으로 몰리고 고문당하는 끔찍한 경험을 했다. 폭력적인 권력 앞에서 윌리엄은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앗소는 그녀가 억울하게 끌려간 밤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영화상에는 표현되지 않았지만, 윌리엄 역시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앗소가 괴로운 밤을 지낸 이유는 그녀에 대한 인간적 애정 때문이었다. 반면에 윌리엄은 비이성과 광폭함 앞에 주저하는 자신의 나약한 모습에 괴로웠을 것이다. 폭력 앞에 나약해지는 양심, 그리고 비도덕을 보고도 외면하는 자신의 나약함에 지식인 윌리엄은 앗소보다 더 괴로운 밤을 지내야 했을 것이다. 그날 밤은 윌리엄에게 있어서 베드로의 "예수 부정" 의 밤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창칼 앞에서 무너진 베드로의 양심과 신념처럼...

그러나 최종 재판 일에 윌리엄은 억울한 피고인들을 적극 변호하고 나선다. 그러나 그의 용기 있는 변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화형을 당한다. 화형보다도 무서운 고문을 피하기 위해 그들은 마구잡이로 거짓자백을 하고 만 것이다. 양심을 무기 삼은 이성의 목소리로는 폭력을 무기 삼은 비이성의 권력을 당해낼 수가 없는 것이다.


폭력과 비이성의 권력을 무너뜨린 것은 바로 민중들이었다. 민중들은 돌멩이를 집기 시작하고, 겁에 질린 이단 심판관은 도망을 친다. 그리고 민중들은 이단 심판관이 탄 마차를 절벽으로 밀어버린다. 악마 같은 광폭한 권력자를 밀어내는 것은 양심 있는 지식인의 힘만으로는 이뤄질 수 없다. 지식인과 민중이 함께 움직일 때만이 악의 권력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이다.

윌리엄은 전형적인 중세 지식인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그가 피고인을 변론한 것은 피고인들에 대한 애정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양심을 더럽히지 않고자 했던 것이다. 반면에 앗소는 그녀에 대한 인간적 애정으로 행동했다. 앗소는 윌리엄보다 조금 더 근세의 지식인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는 그녀를 뒤로한 채 스승을 따라 나선다. 그럼에도 그가 그녀의 얼굴을 평생에 걸쳐 또렷이 기억했다 함은 그가 윌리엄보다는 좀더 민중에게 다가서는 지식인이었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