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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

편혜영 단편 <소풍> <사육장 쪽으로>

by R.H. 2017. 8. 18.



<소풍>



"여자는 내심 여행을 가는 게 귀찮으면서도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W시에 다녀왔다는 자랑을 하고 싶어졌다. 아직 W시에 다녀온 친구는 없었다."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남자와 여자. 그들은 짬을 내어 W시로 여행을 간다. 그런데 이들이 여행을 왜 가는지 도통 이해가 가질 않는다. 여행자의 들뜸이나 설렘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이 여행 전 들른 마트에서 물건을 챙기는 모습도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는다. 여행지에서도 충분히 구할 수 있는 먹을거리를 하나 가득 카트에 담는 남자가 여자는 못마땅하다. 쌀쌀한 날씨에 대비하여 겉옷을 고르는 여자를 남자는 잔뜩 인상 찌푸리며 쳐다본다. 자동차 안에서 나누는 이들의 대화도 짜증스럽기만 하다. 



이들이 여행을 떠나는 시간을 봐도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일이 끝나고 밤 11시에 출발을 하는 여행.. 한밤중에 고속도로를 6시간이나 달려가는 여행. 여행을 여유롭게 할 만큼 시간이 많지 않은 사람들인 것이다. 남자는 신축 아파트 공사장 건설 인부고, 여자는 학원 작문 강사다. 남자는 대학에서 축구를 했으나 프로에 진출하지 못했고, 여자는 소싯적 백일장에서 상 좀 받아본 사람이지만, 프로 작가는 되지 못했다. 



그렇다. 이들은 꿈의 날개를 일찌감치 접은 채, 생활인으로 살고 있다. 한마디로 발전 없는 일을 하며 일상을 꾸역꾸역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란 말이다. 그들의 여행은 그저 남들이 다 하는 여행이니까, 친구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가는 여행인 것이다. 



일상이라는 단어는 무료하긴 하지만 무난한 삶을 뜻하기도 한다. 지루하긴 하지만 위험하지 않은 삶이다.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그 일상이라는 것은 안전한 삶일까. 무난한 삶일까..



짜증과 신경질이 잔잔히 흐르는 가운데 그들은 안개 낀 고속도로를 달린다. 고속도로에서는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다른 차들과 속도를 맞춰야 한다. 혼자 늦게 달리는 것은, 혼자 과속하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게다가 그들이 달리는 고속도로는 안개가 자욱하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들도 우리도 이렇게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면서, 더듬더듬 인생이라는 고속도로 위를 달려간다. 그래서일까. 뒤에서 따라오던 거대한 트럭들은 이들을 위협한다. 번호판도 보이지 않고, 운전자의 얼굴도 보이지 않는 대형 트럭.. 우리의 일상을 위협하는 것들은 안개와도 같고, 번호판도 보이지 않는 대형 트럭과도 같다. 언제 어디서 알 수 없는 대형 트럭이 나타나 우리를 위험에 빠뜨릴지 모를 일이다.



그리하여 남자는 가드레일을 들이받는 사고를 낸다. 남자는 견인차를 부르고, 여자는 가드레일을 넘어 평야를 가로질러 걷는다. 한 시간 뒤, 여자가 돌아왔을 땐, 남자는 이미 견인차와 함께 떠나버렸다. 일상이라는 것은 호수 위의 얼음과도 같다. 고요하고 편안한 외양을 하고 있지만, 언제 박살 날지 모르는 바로 그 얇은 얼음.. 이 두 남녀의 일상은 그렇게 부서져 버렸다..




<사육장 쪽으로>



남자는 도시 외곽에 조성에 전원주택 단지에 입주했다. 도시인으로 살아온 이 남자의 꿈이 이것이었던가.. 중산층의 소박한 꿈이라고 일컬어지는 정형화된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이 이 남자의 희망이긴 했던가.. 그도 잘 모르겠다. 남들이 다 그렇게 이야기하니, 자신의 꿈 역시 그랬던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이 전원주택 단지 너머에는 개 사육장이 있단다. 거기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가 어딘가 모르게 찝찝하다. 그런데 도대체 저 사육장은 어디에 있는 걸까.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누가 운영하는지도 알 수 없고, 개는 보이지 않는데, 개 짖는 소리는 계속해서 들여온다. 이것은 호시탐탐 일상을 파괴하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의 상징이다.

 


도식 외각에 조성된 전원주택 단지에는 비슷한 사람들이 비슷한 집에 살고, 비슷한 미소를 지으며, 비슷한 자가용을 타고 출퇴근을 하며, 주말에는 비슷한 파라솔 아래서 비슷한 고기를 구워 먹는다. 바른 생활 교과서에 나올 법한 도시 중산층의 안락한 일상이다. 그런데 일상이라는 게 참 희한하다. 우리가 말하는 평범이라는 것들은 자세히 보면, 평범하지 않다. 아빠는 차 타고 출근하고, 엄마는 전업주부에, 도심에서 떨어진 이 층 양옥집, 아이들은 대학 나와 직장에 다니고, 때 되면 좋은 짝을 만나 결혼하고.. 남들 다 하는 여행도 해줘야 하고.. 흔해빠진 삶처럼 보이는 이 무던한 일상.. 그러나 절대 쉬운 게 아니다. 



게다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간다고 해서 엄청나게 행복한 것도 아니다. 덤덤한 일상이고, 무난한 일상이다. 그런데 이 일상이 무너지면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일상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도둑이나 강도를 만나서도 아니고 땅이 꺼져서도 하늘이 무너져서도 아니다, 불이 난 것도 아니고 홍수가 난 것도 아니다. 차압을 알리는 얄팍한 경고 편지 한장이면, 일상은 순식간에 어그러진다.



"현관문을 열자 편지 한 통이 팔랑거리며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어느 날 갑자기 집으로 날라온 경고장. 무리해서 도시 외곽의 전원주택을 산 것이 화근이었다. 이들은 파산했다. 도시 중산층의 소박한 꿈의 결정체인 이 전원주택을 빼앗기게 된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일까. 이 모든 무너짐을 상징하는 일이 벌어진다. 앞마당에 놀던 이 집 아이는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르게 나타난 개떼들에게 물어뜯기고 쓰러진다. 정체를 알 수 없던 불안이 드디어 마침내 순식간에 이 집 앞마당에 침투하여 이 가정을 갈기갈기 찢어발긴 것이다. 



남자는 아이를 차에 태우고 병원을 찾는다. 동네 사람들에게 병원을 묻는다. 병원은 사육장 쪽에 있다고 한다. 남자는 차를 몰고 몰아 고개를 넘어가도, 고속도로를 달려도 병원을 찾을 수가 없다. 도대체 병원이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 무너져버린 일상을 치유할 곳을 찾지 못한다. 이 무너져버린 가정을 회복시켜줄 곳이 도대체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