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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소설

에밀 졸라 <목로주점, 1877>

by R.H. 2018. 2. 20.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를 피해, 랑티에라는 남자와 파리로 도망친 젤베즈. 그런데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났다고, 랑티에 이 놈은 여자 등골 파먹고 사는 놈팽인데, 어느 날 젤베즈의 속옷까지 전당포에 맡겨 마련한 돈으로 옆집 여자랑 바람나서 떠나버리는 상쓰레기다. 차라리 잘 됐다. 랑티에가 사라져서 돈은 이제 안 뜯기게 되었으니 말이다. 

 

 

여튼 젤베즈는 날품팔이하며 두 아이를 성실하게 키우는데, 이런 그녀를 눈여겨보던 이웃집 총각 쿠포가 젤베즈에게 청혼한다. 가난하지만 성실한 삶을 살아가는 젤베즈에게 드디어 해 뜰 날이 온 듯하다. 쿠포는 지붕일을 하는 성실하고 순박한 남자다. 이제 남자라면 학을 떼는 젤베즈도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 쿠포의 매너에 감동한다. 구질구질한 삶을 사는 그녀를 구원해줄 남자임에 틀림없다. 

 

 

세상의 모든 동화들은 여기서 끝난다. 힘들어도 슬퍼도 성실한 삶을 사는 캔디와 콩쥐, 신데렐라에게 나타난 구원의 남성으로 인해 그녀들의 삶은 행복해진다. 그런데 말입니다..

 

 

어느날 지붕에서 떨어져, 죽다 살아난 쿠포는 일을 못 해 집에서 쉬는 동안, 나태의 달콤함에 익숙해지고, 급기야 술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한잔이 두 잔 되고, 두 잔이 세잔 되고.. 이젠 일도 하지 않는다. 그래도 젤베즈는 이런 쿠포를 감싸 안는다. '남편이 죽다 살아났는데, 아직 몸이 안 좋은데, 그럴 수도 있지.' 라면서.. 

 

 

여튼 그 와중에 젤베즈는 성실하게 일하고, 저축해서, 목돈을 모아, 세탁소 여주인이 된다. 일하는 사람도 여러 명 둔 어엿한 여사장님이 된 것이다. 쿠포가 놈팽이화되어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어르고 달래서 큰 말썽만 피지 않으면 그만 아닌가.. 쿠포가 예전과 달라진 게 아쉽긴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대체로 만족스러운 삶이다. 젤베즈는 어엿한 가게 사장이고, 동네에서의 평판 역시 좋다. 신용도 좋다. 가게도 그럭저럭 잘 굴러간다. 뭐가 문제인가. 젤베즈의 꿈은 이루어진 거나 마찬가지다. 

 

 

원래 이 여자의 소원은 거창한 게 아니었다. 종일 열심히 일하고, 편한 침대에서 잠을 잘 수 있는 것. 이것이 그녀의 소망이었다. 소박하고 검소한 여자, 성실한 여자. 놀고먹는 남편 바가지 안 긁는 여자. 요즘 말로 개념녀다.

 

 

이렇게 포근한 생활이 이어지는 와중에, 어느 날 갑자기 랑티에가 그녀 주위를 어슬렁거리기 시작한다. 급기야 그녀의 생일파티 날에 집 앞에서 기웃거리고, 이를 본 쿠포가 격분에서 뛰쳐나간다. 아, 이런 악몽 같은 상황이 일어나다니.. 젤베즈는 눈감고 귀 막아 버린다. 헌데 이게 웬일?? 몇 분 뒤 쿠포와 랑티에는 어깨동무를 하며 집으로 들어온다.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인 양 화기애애한 그들. 이게 뭔 시츄에이션?? 멱살잡이 할 용기가 없는 걸까? 강 대 강이 만나면 서로 꼬랑지를 내리는 걸까? 이들 사이의 연대의식이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이제 젤베즈는 이 두 놈팽이를 먹여 살리게 되었다. 기묘한 동거를 시작하면서 살림은 서서히 좀 먹고, 돈은 어디로 새 나가는지도 모르게 새 나가고... 동네에서의 평판과 신용은 나빠지고, 뭐가 어떻게 잘못된 건지도 모르게 가게는 서서히 무너져간다. 시궁창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녀의 삶.. 그리고 결국에는 지독한 파멸로 치닫는다. 어떤 큰 사건이 터져서가 아니라, 가랑비에 옷 젖듯이 삶이 부식되어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야말로 "나태의 느린 정복"이다.

 

 

도대체 젤베즈가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인가? 그녀의 삶이 왜 파멸로 끝나야만 하는가... 그녀가 바란 것은 소박한 안락함 뿐이었는데.. 그녀가 감당 못할 거대한 욕망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악랄한 마음을 가진 것도 아니었으며, 어리석어서 사기를 당한 것도 아니다. 아, 그녀는 스며드는 나태에 단호하지 못했다. 쿠포가 일을 게을리하기 시작했을 때, 단호히 가장의 책무를 하라고 독촉하지 않았다는 것. 쿠포가 술에 맛 들이기 시작했을 때, 단호히 술을 먹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 랑티에가 그들 집에 세 살기를 원했을 때, 단호히 거절하지 않았다는 것. 쿠포가 토해놓은 구역질 나는 침대가 아닌, 푹신한 침대에서 자고 싶다는 작은 나태에 굴복하여 랑티에가 내민 손을 단호히 내치지 않았다는 것.. 그렇다. '이 정도쯤이야...' 하면서 사소한 흐트러짐을 하나하나 용납하면서 그녀의 삶은 결국 파멸한 것이다.

 

 

"그 속에서 어떻게든지 조촐한 행복이나마 만들어 보고자 애를 썼다" 

 

 

젤베즈의 잘못은 바로 이것이었다. 자신에게 불이익이 되는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고, 자신이 착취당하는 것을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 '나보다 더 못한 상황에 있는 사람도 있는걸..' 하면서 자신이 당하는 부당함을 어떻게든 좋게 좋게 생각하려는 버릇, 이것이 최악으로 치닫는 지름길이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