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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소설

에밀 졸라 <나나, 1880>

by R.H. 2018. 3. 4.

 

 

 

 

사랑의 여신 비너스, 태어나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기가 막히게 매혹적인 신인 여배우가 나타났단다. 나나는 과연 누구일까. 얼마나 대단한 여자일까. 이 여자가 비너스 역할을 맡아 파리 무대에 데뷔한다는 소식에 극장은 관객들로 가득 메워진다. 그런데 이게 웬일? 그녀는 노래도, 연기도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다. 요즘 말로 발연기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육체를 전시하는 데 능수능란하다. 그것 하나면 충분하다. "자기 육체가 지닌 절대적인 힘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나나는 자신의 육체로 극장을 압도하고, 관객을 사로잡고, 파리를 휘어잡는다. 그리하여 극장 안을 욕망과 관능으로 잔뜩 부풀어 오르게 만든 나나의 데뷔 무대는 대성공이다. 자고 나니 그녀는 벼락 스타가 되었고, 나나에게 자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재산을 던질 준비가 된 수많은 남자들이 그녀 주위로 몰려든다. 

 

 

헌데 나나는 뜨자마자, 퐁탕이라는 못생긴 조연 배우와 바람이 나서 잠적해버린다. 세상에나.. 이 좋은 기회를 다 내팽개치고 쥐뿔도 없는 놈과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이다니.. 나나, 그녀는 사랑의 여신인 것이다. 돈과 권력 그딴 게 무슨 소용.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완전한 사랑, 바보 같은 사랑... 퐁탕과 동거하면서 나나는 그야말로 진짜 바보가 된다. 퐁탕 같은 인간에게 왜 그렇게 절절 매는지 이해할 수 없는데, 퐁탕 이 놈은 찌질함과 악랄함이 결합된 인물로, 진짜 악질 중에 악질이다. 뭐 세상에 이딴 놈이 다 있나 싶을 정도인데.. 읽다 보면 혈압이 오를 지경임. <목로주점>의 랑티에나 쿠포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상 쓰레기다. 여튼 에밀 졸라 주위에 진짜로 퐁탕 같은 인물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퐁탕의 저급하고 악질적인 행동들이 너무나도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이건 작가가 진짜 이런 인간을 직접 보지 않은 이상 이렇게 제대로 묘사할 순 없다. 

 

 

여하튼 몸도, 마음도, 사랑도 줘도 되지만, 돈은 주면 안 된다는 걸 깜빡한 사랑의 여신 나나는 퐁탕에게 돈 다 뜯기고, 뚜들겨 맞을 대로 맞은 다음, 동거 몇 달 만에 맨몸으로 쫓겨난다. 이 혹독한 경험은 그녀에게 큰 교훈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잊고 있던 과거를 기억하게 해 주었을 것이다. 그렇다. 나나는 <목로주점> 젤베즈의 딸이다. 남자들한테 등골 파 먹히고 살다가 파멸에 이른 그 젤베즈 말이다. 이젠 사랑 따윈 필요 없다.

 

 

욕망의 여신, 깨어나다

 

 

다시 극장으로 복귀한 나나는 자신이 원하는 배역을 손쉽게 확보하고, 이전에 자기 주위를 맴돌던 돈 많은 남자들을 잡아당기기 시작한다. 그 일 번 타자가 뮈파 백작이다. 욕망과 공포 사이를 우왕좌왕하며 정신을 잃어버리고 파멸로 치닫는 캐릭터는 에밀 졸라 소설들에서 가장 핵심적인 특징 중 하나인데, <나나>에서는 종교적이고 금욕적인 뮈파 백작이 그 특징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이다. 다른 많은 남자들, 즉 금융 재벌 스타이너, 신문 기자 포슈리와 그의 사촌 동생, 위공 형제, 슈아르 후작 등등 많은 남자들이 나나에 의해 파멸에 이르는데, 그중 가장 가련한 인물은 뮈파 백작이다. 당해도 너무 당하고, 돈을 뜯겨도 너무 뜯겨서 불쌍할 지경이다. 

 

 

다른 인물들은 원래 음탕하였으니 그렇다 치고.. 뮈파 백작은 원래 대단히 금욕적이고 종교적인 인물이었다. 이 인물이 저지른 죄가 무엇인가.. 왜 이렇게 나나라는 이름의 욕망에 머리채 잡혀서 이리저리 질질 끌려다녀야 하는가.. 더 웃긴 것은 나나는 자신을 짓이겼던 퐁탕에게는 전혀 복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극장에 복귀하자마자 자신의 파워를 입증한 나나는 맘만 먹으면 조연배우 퐁탕따위는 업계에 발도 못 붙이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퐁탕을 쿨하게 대하고, 잊어버린다.. 이 이상한 행동들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복수의 여신, 불타오르다

 

 

"그녀는 수많은 남자들을 발밑에 쓰러뜨린 뒤 재물이 산더미처럼 쌓인 이 저택 한가운데에 혼자 서 있는 것이다. 자신의 무서운 영토를 해골로 뒤덮었다는 옛날의 괴물들처럼 그녀는 해골들 위에 서 있는 것이다...파멸과 죽음을 가져온 그녀의 작업이 마침내 완수되었다....... 그녀는 거지와 폐인밖에 없는 그녀의 세상을 위해 복수한 것이다...... 그녀는 매우 아름다운 짐승 같은 무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자기가 한 일이 무엇인지 여전히 잘 모르는 천진한 소녀였다"

 

 

나나는 그 자체가 욕망이다. 자신의 본능대로만 움직이는 여자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거나 계획하는 여자가 아니다. 의지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여자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신적인 존재다. 그녀는 복수할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뜻하지 않게 복수한 것이다. 누구를 향한 복수인가. 누구를 발길질하며 엉덩이를 마구 걷어찼는가. 어떤 옷을 벗기었는가, 어디에 침을 뱉었는가, 무엇을 짓밟았는가..

 

 

"마침내 "저리 가! 이 시종아!" 하며 엉덩이를 마구 걷어찼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 위에서 두려움과 복종심을 불러일으키며 군림하고 있는 준엄한 튀일리 궁전의 심장 한가운데에 질러대는 발길질이었다.  그것이 바로 그녀가 사회에 대해 생각하는 바였다! 피를 통해 물려받은 그녀가 집안의 무의식적인 원한과 보복심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제복을 벗게..침을 뱉으라고 소리쳤다. 다음으로 그녀는 금실이며 독수리 장식이며 훈장을 밟고 다니라고 외쳤다."

 

 

그렇다. 궁정에 출입하는 뮈파 백작은 시대의 권력을 상징한다. 장난처럼 저지르는 나나의 변태적 행위들은 바로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는 그들을 향한 모욕이고 발길질이고, 침 뱉음이다. 그녀는 그들의 제복과 위선을 벗기었고, 그들의 독수리 장식과 훈장을 짓밟은 것이다. 그녀가 의도적으로 권력자들을 조롱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복수의 여신이 된 것이다. 자신의 본성이 하늘의 명이라 했으니... 그저 자신의 본능에 충실했던 나나는 뜻하지 않게 하늘의 명을 충실히 실천한 것이다..

 

 

추가

 

욕망, 공포, 절망, 파멸... 이 모든 것을 포함 하는 단어.. 그것은 전쟁. <인간 짐승>과 마찬가지로 <나나> 역시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병사들의 고함소리로 소설을 마무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