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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소설

기 드 모파상 <벨 아미,1885>

by R.H. 2018. 1. 13.

 

 

 

 

"그곳에 계속 남아 있을 걸! 어쩌겠는가. 파리로 오면 좋을 줄 알았다. 하지만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그랬다. 아주 꼴좋게 되었다!"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에서 2년을 복무한 뒤 제대한 뒤르아는 지금 수중에 땡전 한 푼 없다. 주머니에 있는 동전 몇 개로 점심을 굶을까, 저녁을 굶을까.. 고민하는 지경이다. 식민지에선 맘대로 약탈하고, 그걸 자랑하기도 했는데.. 식민지에선 제1 세계 백인 남성의 우월감을 맘껏 느낄 수 있었는데.. 파리로 오니 이게 뭔 꼴인가.. 그렇다면 뒤르아는 왜 그 편한 자리를 그만두고 파리로 왔을까. 

 

 

이 소설은 1885년에 발표된 소설이다. 이 시기에 프랑스는 이미 의회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자본주의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즉, 정치군인이 눈부시게 성공하던 시대는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종말을 맞이한 것이고, 귀족의 시대도 이미 끝났다. 나중에 나오지만, 뒤루아는 수중에 돈이 생기자 자기 멋대로 이름에 귀족 칭호인 '드'를 붙이고, 자기 맘대로 남작이라고 칭한다. 조선시대 말기에 돈 주고 양반 족보 사듯이, 이 시대의 파리 역시 귀족 칭호는 별 것 아닌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제 제복도, 귀족 칭호도 아니라, 돈이다.

 

 

뒤루아는 그땐 정확히 몰랐을 것이다. 자기 안에 들끓는 욕망의 실체가 정확히 뭔지.. 하지만 군인으로서의 성공은 과거와 달리 한계가 있는 시대에 굳이 군에 남을 이유가 없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선명하게 인지하지는 못했어도, 본능적으로 그걸 느꼈기 때문에 군대를 나온 것이다. 그가 바라는 것, 그가 원하는 것은 더 큰 것, 더 높은 곳.. 아니 가장 큰 것, 가장 높은 곳이다.

 

 

현룡재전 이견대인,이라 했던가. 뒤루아는 알제리에서 같이 복무한 포레스티에를 길에서 우연히 만난다. 그는 이미 결혼도 했고, 잘 나가는 기자가 되었다. 공짜로 공연장에 드나들면서 거들먹거리는 모습이, 뒤루아 눈에는 뭔가 있어 보이기까지 한다. 그까짓 게 뭐라고.. 여튼 뒤루아는 포레스티에의 도움으로 기자가 되는데, 신문사에 들어가 다른 기자로부터 젤 먼저 배우는 건 취재비 삥땅 치는 법이다. 인터뷰가 웬 말인가. 그냥 여기저기서 짜깁기 해서 두루뭉술 기사 쓰고 교통비 청구하면 되는 것이다. 이거보다 더 큰 뒷주머니를 차는 법도 있다. 

 

 

"하지만 사회면 가십 기사만은 못 당합니다. 은근슬쩍 광고해 주면서 뜯어낼 수 있거든요" 

 

 

크... 신문사는 바로 저런 곳이다. 저 찌짠스러움.. 이것은 진정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그들의 공통 속성이란 말인가.. 하지만 저런 구질구질함은 비웃고 넘어갈 수준이다. 진짜배기는 따로 있다. 바로 신문사 사장이 추구하는 것, 꾸며내는 것.. 그가 추구하는 것은 정치권력과 결탁한 어마어마한 돈, 천문학적인 돈이다. 신문사를 이용해 소문을 만들고 부풀려 여론을 만들고, 그걸 이용해 정치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막대한 이권을 챙기는 것이다. 이렇게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모든 지저분한 욕망이 소용돌이치는 곳. 이곳이 바로 <라 비 프랑세즈>라는 신문사다. 돈과 욕망이라는 시대정신에 가장 충실한 곳이고, 그 시대정신에 가장 충실한 뒤루아에게 가장 걸맞은 장소다.

 

 

"그때... 멋진 마차 한 대가 지나갔다. 마차가 끄는 날씬한 백마 두 마리는 갈기와 꼬리를 바람에 휘날리며 달렸다. 말을 모는 저 자그마한 젊은 금발 여인은 유명한 창녀였다... 뒤루아는 걸음을 멈추었다. 연애로 출세한 저 여자에게 가서 인사를 하고 갈채를 보내고 싶었다. 여자는 침대에서 뒹굴면서 벌어들인 멋진 사치품을 위선 덩어리인 귀족들에게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뒤루아는 저 여자와 가기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기자인 뒤르아와 창녀는 다를 바 없다. 아니, 창녀보다 못할지도 모른다. 몸을 파는 게 더 더러울까.. 영혼을 파는 게 더 더러울까.. 막대한 이권 사업을 위해 사장 따까리, 정치인 따까리 노릇을 하는 게 창녀와 뭐가 다르단 말인가. 그나마 뒤루아가 다른 자들보다 조금 나은 점은 적어도 자신이 창녀와 같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위선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 욕망을 숨기지 않는 솔직한 인간이다. "구레나룻과 콧수염을 기르고 거드름을 피우며 입술에 힘을 준 거만한 얼굴"과 무례한 눈길의 인간들 안에 감춰진 비열함을 그는 비웃는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나지막이 외친다. "위선자들!!!" 

 

 

"여자들을 이용하는 게 제일 빠른 길이라네"

 

 

뒤루아.. 그는 "교활하고, 민첩하고 융통성이 있고, 온갖 술수를 사용할 줄" 아는 인간이다. 게다가 그가 가진 최고의 밑천인 '잘생김'으로 여자들을 이용해가면서 재산을 축적하고, 더 높은 곳으로 점점 올라간다. 동료인 포레스티에가 죽자마자, 그 시체 옆에서 포레스티에의 아내인 마들렌에게 청혼한다. 마들렌은 아름답고 똑똑한 여자다. 그 여자 덕에 첫 기사를 신문에 실을 수 있었고, 그 여자의 조언으로 사교계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게다가 마들렌이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을 거의 뺏다시피 해서 반을 자기 앞으로 돌려놓았다. 

 

 

이렇게 무일푼이었던 뒤루아를 백만장자로 만들고, 영향력 있는 기자로 만드는데 동업자 역할을 했던 마들렌이건만.. 신문사 사장 왈테르가 정치적 사건을 이용해서 순식간에 최고 부자가 되자, 뒤르아는 사장의 딸과 결혼하려 한다. 내연녀인 드 마렐을 이용은 이용대로 해 먹고는, 사장 딸과 결혼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싶으니, 흠씬 두들겨 팬다. 또 다른 내연녀인 왈테르 부인 역시 이용을 다 해 먹고는 잔인하게 밀쳐낸다. 그렇다. 뒤루아는 내연내의 딸과 결혼하려는 것이다. 이런 막장이.. 

 

 

뒤루아는 이렇게 사장 딸과 결혼하기 위해 내연녀들을 잔인하게 대하고, 야비한 계획으로 마들렌의 간통 현장을 급습하여 마들렌과는 깔끔하게 이혼한다. 애인 각자 두는 건 뒤르아와 마들렌 사이에 서로 익스큐즈 된 상황 아니었던가.. 암묵적으로 서로 터치 안하기로 해놓고, 뒤루아는 이렇게 비열하게 나온다. 그리고 결국에는 사장 딸과 화려한 결혼식을 올린다.

 

 

그런데 세상에나..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이런 자가 망하지도 파멸하지도 않고 성공가도를 달리는 것을 보여주고, 심지어 앞으로 더 큰 성공을 이룰 것이라는 암시를 하면서 끝난다. 20년 후인 1900년대 초반이 되면 뒤루아는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라면서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백년 후인, 2000년대 초반에 <벨 아미 제2권> 이 나온다면, 뒤루아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온갖 꼼수와 비열과 교활함으로 성공가도를 달린 이 인간은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까.. 소설이 아니라, 현실에서, 20세기가 아니라 21세기에서, 파리가 아니라, 서울에서, 이 역겨운 뒤루아들은 과연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인가... 100년 전과 같은 결말을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결말을 맞이할 것인가...

 

 

추가

 

뒤루아에게 몸주고 마음 주고 사랑도 준 드 마렐 부인과 왈테르 부인은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비참하다. 그런데 뒤루아에게 이혼당하는 마들렌은 비참하진 않음. 간통 현장을 습격당하고서 마들렌은 처음에는 살짝 당황하지만, 이내 평정심을 찾고, 쿨내 풀풀 풍김. 벽난로에 기대어 담배에 불 붙이며 간통남을 추궁하는 경찰을 바라보는 무심함. 경찰에게 이런 일 자주 하시냐고 묻는 여유로움. 경찰이 자주 하진 않는다니, '뭐 지저분한 일이니까'라며, 마치 남 일 얘기하듯 말하는 시니컬함. 

 

이건 아마도 마들렌은 다른 여자들과 달리 뒤루아에게 사랑따윈 주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결혼은 일종의 계약이라고 생각하고, 뒤루아를 철저하게 동업자적 마인드로 대했기 때문에, 간통 현장을 들키고도 '이 계약 파투 났네. 그뿐이죠.' 라며 어깨 한 번 으쓱하고 마는 느낌이다. 타짜의 정마담 식의 쿨함이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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