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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8

이청준 단편 <숨은 손가락,1985 > <가해자의 얼굴, 1992> "자신의 죽음을 고발로 모면"한 동준은 가해자이자, 피해자다. 이 더러운 세상이, 이 지옥같은 전쟁이, 끔찍한 이데올로기가 그를 이렇게 몰고 갔다, 악마같은 그들이 덫을 놓고, 그를 함정에 빠뜨렸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이해가는 말이지만, 옳은 말은 아니다. 이해받을 수 있다 하여, 무죄는 아닌 것이다. 내 목숨을 구걸하고자, 타인을 지목한 이 더러운 손가락이 내 몸에 붙어있는 한, 영원히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신 역시 가해자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고백하지 않는다면, 그 추악한 손가락을 잘라내지 않는다면.. 결국 그에게 남은 것은 죽음 뿐이다. 북쪽 사람에게도 남쪽 사람에게도 쫓기는 사람. 좌에서도 우에서도 죽이려드는 사람. 그 사람이 소년의 자형 소식을 알려준다면서, 소년의 .. 2016. 8. 30.
이청준 단편 <줄뺨, 1974> 집단을 가장 손쉽게 장악하는 방법은 체벌, 기합이다. 그리고 체벌에서 가장 초보적인 수준의 방법은 망신주기다. 망신 당하지 않기 위해 힘 가진 자의 명령에 복종해야함을 배우는 것이다. 망신 당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지켜보는 사람에게도 가르침을 준다. 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저기 저 망신 당하는 사람이 무고하고 억울하고 비합리적인 이유로 망신 당하고 있지만, 넌 이 상황을 바꿀 수 없다. 네가 할 수 있는 건 괴로워하고 굴욕감을 느끼는 것 뿐이다... 힘있는 자의 망신주기는 억압 당하는 자에게 무력함과 굴종을 가르치는 것이다. 망신주기 체벌이 먹혀들어가지 않을 경우엔, 좀 더 쎈 체벌이 있다. 낙오자, 패배자를 만들기다. 에선 연병장 돌기가 그 방법이다. 허약한 자들은 연병장을 돌다가 낙오한다. 트랙.. 2016. 8. 29.
헨릭 입센 <유령, 1881> 을 제대로 읽어본다면, 진짜 욕 먹어야하는 캐릭터는 "세상물정 모르고" 집을 뛰쳐나간 노라가 아니라, 찌질하고 위선적이며 가증스러운 남편이란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런데 세간 사람들이 을 제대로 보지도, 읽지도 않고 욕 했던 듯하다. 그래서 입센은 에서 다음 장면을 집어넣었다. 아르빙 부인의 테이블 위에 놓인 책. 목사는 눈쌀찌푸린다. 구체적으로 어떤 책인지 알려주진 않았으나, 당시 기준 진보적인 책이라는 뉘앙스다. 이에 아르빙 부인은 목사에게 그 책을 읽어보았냐고 묻는다. 하지만 목사는 세간의 비평만을 들었을 뿐, 읽어본 적은 없단다. 아르빙 부인이 왜 읽지도 않고 책을 뭐라하냐하니.. 굳이 이런 책을 읽을 필요까진 없고, 권위있는 사람들의 해석과 평가를 받아들이면 된다는 식이다. 이 받았던 비난의 .. 2016. 8. 27.
헨릭 입센 <인형의 집, 1879> 몇 달후면 은행장에 취임하는 남편, 그리고 그의 아내 노라. 전형적인 도시 중상층 가정의 이 여자는 낭비벽이 꽤 심한 듯하다. 짐꾼에게도 넉넉한 팁을 주고, 아이들을 위한 선물을 이거저거 사대는 걸 보니 말이다. 남편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뭘 원하냐는데, 돈을 달라하는 걸 보니, 확실히 돈을 좋아하는 여인인가보다. 남편은 이런 여자를 귀엽게 바라보고 "종달새"라 부르며 사랑스러워한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가짜다. 그녀는 이른바 "개념녀" 다. 몇년전 남편이 죽을 병에 걸렸을 때, 남편의 요양비를 구하기 위해 쩔쩔맨 적이 있다. 그 시대에 여자는 단독으로 대출을 받을 수 없었기에 보증인이 필요했다. 해서 친정 아버지 서명을 자기 임으로 해서, 크로그스터란 자를 통해 돈을 융통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남편에게.. 2016. 8. 27.
이청준 단편 소설 <침몰선, 1968> "빌어먹을! 전쟁이라도 났으면!" 그들은 가끔 씨부려대었다... "그때는 오히려 좋았겠어요! 이건 뭡니까" 하긴 그럴 수밖에 없는 노릇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진짜 싸움 이야기는 알지 못했고, 게다가 그 우스운 군대 놀이의 이야기들에는 자신들도 입이 닳아 맥이 빠졌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에겐 정말로 신나는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본문 발췌) 진짜 전쟁이 뭔지 모르는 풋내기 군인들은 꼬맹이들을 모아놓고 가짜 전쟁 무용담을 신나게 지껄여댄다. 하지만 진짜 전쟁을 겪은 후, 그들은 더이상 전쟁을 말하지 않는다. 험상궂은 얼굴고 신경질내며 침묵할 뿐.... 진짜 전쟁의 참혹한 민낯을 알지 못하는 자는 전쟁을 숭배하고, 전쟁이라도 났으면 좋겠다는 끔찍한 말들을 씨부려대고, 진짜 삶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 자기.. 2016. 8. 25.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열차 안의 낯선 자들, 1950> 가이는 전형적인 모범시민이자 전도유망한 건축가다. 삶에 목표가 있고, 인생을 계획하는 인간이다. 그야말로 "그럴리 없는" 사람의 전형이다. 반면에 브루노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인간이다. 삶의 목표도 없이, 되는 대로 사는 휘청거리는 인간이다. 이렇게 정반대의 인간인 두 사람이 열차 안에서 우연히 만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런데 과연 이 두 사람이 완전 정반대의 인간이기만 할까. 과연 그들의 만남이 우연이긴 한 걸까. 인간은 자신과 같은 유형의 인간을 단박에 알아본다. 자기와 같은 상처를 가진 인간, 같은 고통을 가진 인간, 같은 적의를 가진 인간을 말이다. 브루노와 가이의 만남이 겉 보기엔 우연인 듯 하지만, 실은 본능적으로 끌린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살의를 가슴에 품은 브루노는 가이의 숨.. 2016. 8. 23.
편혜영 <선의 법칙, 2015> 양복입는 일에 현혹되어 제3금융권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이수호...일확천금이라는 부풀려진 환상에 현혹되어 다단계에 빠진 윤세오, 신하정, 부이.. 수많은 사람들이 양복입고 하는 일에 환상을 갖지만, 그 일들은 사실 하찮고 지저분하며 모욕적인 일이다. 남보기 그럴싸해보이는 일, 다양한 종류의 그럴듯한 사업과 투자 따위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미끼를 던지고, 우리는 말려들어간다. 그 뿐인가. 해외로 이민가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냥, 가면 바로 선진국 중산층 시민으로 편입될 수 있는 냥, 선전하는 문구들. 환상들.. 우리 모두는 20대 언저리에서 어딘가로 빨려들어갔다. 그들은 우리를 유혹한다. 멋진 일, 멋진 곳이라고, 황금을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곳이라고.. 하지만 모두 함정이다. 그야말로 "시스템이 부풀려.. 2016. 8. 19.
도스또예프스끼 <영원한 남편, 1870> 39세의 벨차노프는 건장하고 잘생긴 외모에 쾌활함과 명랑함, 그리고 화술까지 갖춘 멋진 남자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우울증에 빠진다. 사소한 유산 상속 소송에 발목잡힌 것이 우울증의 발단이다. 그러나 소송 사건이 신경 거슬리는 건 사실이지만, 쾌활하고 건장한 그리고 평생을 활달하게 산 남자가 밑도끝도 없이 느닷없이 우울증에 빠져들 정도로 대단한 일은 아니다. 아마도 작은 성냥불이 산불을 일으키듯, 이 사소한 사건을 시작으로 걷잡을 수 없는 우울의 구렁텅이에 빠진 듯 하다. 이때 불현듯 나타난 정체불명의 남자. 모자에 상장(喪章)을 달고 나타나, 우리의 주인공 주위를 배회하는 남자, 빠벨 빠블로비치.... 그는 벨차니노프가 한때 사랑했던 유부녀 나탈리아의 남편인데, 나탈리아는 얼마전 사망하였다는(그래서 .. 2016. 8. 15.